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지가 어언 80년이 다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가야를 일본 야마토왜가 점령하고 일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왜곡하고 있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가야 건국연대를 3세기라고 부정하는 이유가 바로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무슨 근거로 가야를 임나일본부라고 하는지 살펴보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거짖 선동을 한 번 더 짚어보고자 한다.
가야 건국연대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에 기록된 가야 건국연대와 관련된 설명을 보자
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녀까지 지금의 경상남북도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로서 가락駕洛, 가라加羅, 가라伽羅 라고도 불렀다. 가야의 건국 연대에 대해 《삼국사기》<김유신열전>과 《삼국유사》<가락국기>는 모두 ‘서기 42년’ 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온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68.
[ 가야 건국연대,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68p ]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사를 믿을 수 없다는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 을 펴면서 가야의 건국연대를 부정했다. 또 시조 김수로왕이 42년부터 199년까지 158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는 것과 가야가 존속했던 520년 동안 10명의 왕밖에 없었서 한 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다는 등의 논리로 건국연대를 부정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특정 국왕들의 존재를 부인하고 다른 왕에게 그 재위기간을 합치는 것은 고구려 태조대왕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10명 이상의 국왕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
또 하나는 중국의 《삼국지》<동이열전>에 변진弁辰의 12국 중의 하나인 구야국이 가야라는 것이다. 《삼국지》는 3세기 때 기록이니 이때까지 가야는 독립국가가 아니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삼국지》의 구야를 가야라고 보는 근거는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 하나뿐이다. 더구나 같은 《삼국지》지만 오환烏桓같은 경우는 서기전 3세기의 진,한秦漢 때부터 기록하고 있다. <동이열전> 서문도 상고시대 순舜임금부터 설명하고 있으니 《삼국지》에 나온다는 이유로 3세기에 건국했다는 것은 《삼국지》의 논리로도 맞지 않다.
그러나 가야가 서기 1세기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는 서기 77년 신라 아찬 길문이 가야 군사들과 황산진 어귀에서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서기 94년에는 가야가 신라의 마두성을 포휘했고, 2년 후에는 가야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침략했는데, 이에 분노한 신라는 그 다음 해인 서기 97년에 가야를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가야가 1세기 중반에 건국되어 신라와 여러 차례 격전을 치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69p

[ 이미지 출처: 예스24 인터넷서점 ]
남원에서 21세기 의병이 일어나다
문재인대통령 때 국정과제의 하나로 가야사 재정립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런대 가야사를 대통령이 지시했으면 1차 사료인 중국고서나 우리나라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를 참조해서 복원하면 되는데 왜 일본서기를 끓으들여서 임나일본부가 가야에 있었던 것처럼 주장을 하고 있을까?
전라도 남원을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국”이라고 확정을 짖고 유네스코에 등재하려다 제동이 걸렸고 이를 인지한 남원 시민들이 남원 시청 앞에서 시위를 했다.
2021.8.2.일 남원 시청 앞에서 시민들이 시위를 하는데 “남원이 일본식민지 기문국이라고 하는 곳은 한곳도 없다. 역사 조작하지 말고 하루 빨리 기문국을 삭제하여 유네스코에 등재하라” 라는 플랭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다.
남원시민들이 식민사학에 맞서 21세기 의병을 일으킨 사건일 것이다.
일본서기에 “기문국”이라는 곳이 사료에 한곳도 없다는 뜻이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
지도를 보면 남원지역을 한자로 “기문”이라고 표기해놓고 있다. 이 지도를 가지고 유네스코에 등재하려 한 것이다. 과거에는 가야지역을 임나라고 했는데 어느새 전라도 백제땅까지 일본이 지배했다고 한다.

[ 지도 이미지 출처: 이덕일의 역사 TV ]
위 지도는 일본 식민사학자 쓰에마스 야스카즈가 1949년에 쓴 책 임나흥망사에 나오는 지도이다. 일본 극우파들이 보면 뿌듯해 하는 지도같다. 왼쪽에 보면 370년부터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충청도 일부까지 일본이 지배했다고 붉은색 선을 그어 표기해놓고 있다. 그리고 475년경에는 충청도를 빼고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일부, 경상남북도 일부까지 지배했다고 선을 그어 놓았다.
그리고 남원지역을 기문(己汶)이라고 표기 해 놓았다.
그럼 370년 경부터 백제가 멸망한 660년까지 무려 300년가까이 임나가 전라도 지역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럼 그때 지배했던 임나의 왕들의 무덤은 모두 어디 있는가??
무려 300년 가까이 가야와 백제지역을 지배한 임나의 왕은 죽고나서 어디에다 묻었을까? 그 흔한 고분하나 없고 유물도 없다. 임나의 왕이 죽고나서 시신을 일본으로 가져가서 일본 어디에다 매장을 했나? 300년이면 대충 어림잡아 한 명이 30년을 왕노릇 했다고 해도 30명인데….왕의 무덤이 30개가 있어야 하지 않나?
왜 가야와 백제지역에 있는 고분들은 하나같이 백제왕들과 가야 왕들의 무덤밖에 없는가?? “일본서기” 의 내용이 틀렸던지 아니면 임나가 일본지역에 있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가야와 백제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일테다.
일본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는 “기문반파고” 라는 책에서 “기문은 남원에 있었던 것이 명백하고<중략>..이상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은 섬진강 유역에 있는 남원에 해당해야 할 일이다.” 라고 쓰고 있다. ( 기문반파고(己汶伴跛考) <사림 史林>, 대정 11년 (1922) 10월 1일 )
“기문”이 무엇 인가? 식민사학자들은 절대 자세하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을 살펴보면,
7년(513년) 여름 6월에 백제(무령왕 13년)에서 조미문귀 장군 , 즉 주리즉이 장군을 혜적신압산에게 딸려 보내서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백제 임금이 따로 황제께 주문을 올려서 “반파국이 신의 나라 기문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기는 하늘의 은혜로 판단하셔서 본래대로 속하게 해주소서” 라고 주청했다. <일본서기 계체 7년 >
백제 무령왕이 야마토왜왕의 신하를 자처하면서 ‘하늘의 은혜’를 내려달라고 빌었다는 내용이다. 남한 강단사학은 반파는 성주, 기문은 남원이라고 주장한다 – 이덕일 역사 TV –
1970년에 백제 무령왕의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이런 글이 있다. “백제 사마왕께서 62세되는 계묘년 (523년)5월7일에 붕(崩 : 황제의 죽음) 하셨다. (무령왕릉 지석)-이덕일의 역사TV
”붕“ 하다의 붕은 황제가 죽었을 때 쓰는 단어이다. 백제 백성들이 무령왕을 황제로 불렀다는 뜻이다. 황제가 야마토왜왕에게 ”엎드려 빌면서 하늘의 은혜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는 뜻이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한나라의 왕(백제 백성들은 황제로 불렀다)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엎드려 빌면서 은혜를 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게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신하를 보내서 그 신하가 야마토왜왕에게 엎드려 빌면서 했다면 이해는 간다.
백제황제가 야마토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

[ 칠지도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
그리고 백제에서 야마토왜에 내려준 칠지도에서는 ‘제후에게 하사할 만하다”라고 쓰여있는 내용이 있다. 이는 백제왕이 야마토왜왕을 제후로 보았다는 뜻이다.
< 앞면 >
泰[和] 四年 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作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 만들었다.
< 뒷면 >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奇生)이 성음(聖音)으로 왜왕 지를 위해 만들게 하였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출처 : 나무위키
여러 증거에 의해 백제왕은 황제이고 야마토왜는 제후국이라는 말해준다. 그런데도 “일본서기”에는 백제왕이 야마토왜왕에게 엎드려 은혜를 달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서기”는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연도부터 틀리는 역사서라고 “나이토 토라지오” 일본 역사학자가 이미 말했다. 그런 역사책을 가치가 있다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일본서기”를 보고 가야가 임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런 “칠지도” 같은 역사 유물이 말해주고 있다.
아니면, 중국 고대 1차사료나 조선의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백제왕이 일본 야마토왜왕에게 엎드려 빌었다는 내용이 단 한줄이라도 나오던지 그 비슷한 내용이라도 있으면 그건 무조건 “일본서기”의 기록을 인정해야한다. 1차 문헌사료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 그리고 “스에마쓰 야스카즈” 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문”이 전라도 “남원”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중국사료와 한국사료에 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중국사료와 한국 사료에 “기문“이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자.
중국사료 『한원』에 나타난 기문(己汶)
한원(翰苑)[당나라 장초금 660년] 의 웅진하 기문하는 어느곳인가?
(괄지지)에서 말하기를 ’웅진하‘는 수원이(즉 발원지) 이 나라의 동쪽 경계지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나라 북쪽으로 백리를 흘러가다가 서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폭이 넓은 곳은 삼백보이다. 그 물이 아주 맑다.
또 기문하(基汶河)가 있는데 (수원이 그나라에 있다) 수원이 그나라의 남산(南山)에 있는데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 강속의 어족들은 중국과 같다. -- 이덕일의 역사 TV
【 한원 】설명
《한원》은 원래 아동 대상의 (훗날의 4-4-6-4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사륙병려문 창작을 위한) 대구(對句) 연습용 교재로써 저자 장초금이 자신의 일족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용으로 이 책을 작성하였다고 지적되고 있다. -- 설명출처: 위키백과
【 괄지지 】설명
괄지지는 중국 당나라때 복왕태 등이 집필한 지지(地志) 이다.-- 설명출처: 위키백과
웅진하는 금강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문하는 섬진강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강이름을 “기문하”라고 했는데 저 중국사료 “한원”의 기록속에 “기문하가 남원이다” 라는 기록이 어디있는가?
섬진강이 남원 옆으로 흐른다. 그래서 “기문”이 “남원”이다 라고 식민사학자들은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서기”가 진정한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볼 때 일부 설득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자체가 연대부터 틀린 것으로 볼 때 백제가 멸망하고 난 뒤 자신들의 역사를 고쳐쓰기 위해 “일본서기”를 편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이라는 용어 자체도 백제 멸망 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근데 일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기록하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부랴부랴 반대로 자신들이 백제와 가야를 지배했다는 역사서를 만들다보니 연대도 엉망이고 모든 기록이 유치원생 수준으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사료 “한원”에서 “기문하”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그 “기문하”가 비록 섬진강이라고 하자 그러면 “기문하” 와 “남원” 은 무슨 관계인가?
그저 하나의 흐르는 강 이름과 특징을 설명해 놓은 것인데 그 강 명칭과 “남원”이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러면, “기문하”가 “남원”이면, 낙동강 옆 도시는 낙동, 섬진강 옆 도시는 섬진, 대동강 옆 도시는 대동, 북한강 옆 도시는 북한, 나일강 옆 도시는 나일, 미시시피 강 옆도시는 미시, 압록강 옆 도시는 압록, 두만강 옆 도시는 두만, 황하강 옆 도시는 황하라는 기록들이 역사 사료에 나와야 하지 않는가?
중국 사료 『양직공도』에 나타난 기문(己汶)

[ 이미지 출처: 이덕일의 역사TV ]
” 양직공도” ( 양직공도(梁職貢圖)는 6세기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에 온 외국의 사신들과 그 나라의 풍속 등을 양 원제가 간략히 적은 그림(모사본)이다. — 설명 출처: 위키백과
“ 백제는 옛날 구이로서 마한에 속해 있었는데 , 진(晉) 말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낙랑(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영유했다.<중략>..다스리는 곳은 다스리는 곳은 고마(固麻)라고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에 해당한다. 22개 담로가 잇는데 왕의 자제와 종족들이 나누어 한다( 한다는 다스린다). 나라 곁에 소국들이 있는데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 등이 부용하고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다. -- 이덕일의 역사TV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중국사료로 “양직공도”에 “남원”이라고 주장하는 “기문”이 나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기문”이라는 단어는 없고 “상사문” 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이 “상사문(上巳文)” 이 보인다. 이들은 이를 “상기문” 이라고 읽고 중국 사료에 “기문”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눈이 사시인가 색맹인가? 어떻게 “상사문” 이 “상기문” 으로 보이는가??
뱀사(巳) 를 자기기(己)자로 바꿔서 중국 사료에 “상기문”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이들은 중국사료 ‘양직공도” 속의 “상사문” 이 “양원제”가 실수로 “자기기己” 자를 써야하는데 잘못해서 “뱀사巳”자를 썼다고 억지를 부릴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나온다.
남한 역사사료에 나타난 기문(己汶)
우륵이 열두곡을 지엇는데 1. 하가라도 2.상가라도 3.보기, 4.달이 5.사물 6.물혜. 7.하기물 8. 사자기 9. 거열 10. 사팔혜 11. 이사 12.상기물 이다. [ 괄호 정구복 외 (역구삼국사기)]
【 우륵 】설명
우륵(于勒, ?~?)은 대가야의 악사이다.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중국의 악기인 쟁(箏)을 모방해 가야금(伽倻琴)을 만들고 12악곡을 지었다.-- 위키백과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사료 “삼국사기”에 “기문(己汶)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는 위에서 보는 것처럼 우륵이 열두곡을 지었는데 그 12곡의 명칭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 열 두 번째 “상기물” 이라는 곡이 있다. 이들 식민사학자들은 이 열 두번 째 곡 “상기물”을 “상기문”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의 역사서에도 “기문”이 나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기물”과 “상기문”이 같은 단어인가? 또 이들은 삼국사기에 잘못 기록해서 “상기문”인데 “상기물”로 기록 한 것으로 주장 할 것인가?
“이마니시 류” 의 “기문반파고” 에 나오는 글
[[ 백제에서 기문(己汶) 으로 불린 지방이 지금의 충청남도의 북부에 있어서 금물(今勿) 이라고 쓰였는데 당이 백제를 평정하고 1도독부 7주의 제도를 실시하자 이곳을 기문현이라고 고치고 지심주에 속하는 9현의 하나로 삼았다. 금물을 기문으로 고친 것은 문자를 고친 것에 지니지 않는다. 신라인은 당인이 기문으로 고친 것을 복구해서 금물이라고 한 것 같은데 경덕왕때에 금무로 고쳤다. 무武는 모慕, 모牟는 무茂와 음이 통한다.
기문이라는 문자가 당인이 고친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백제인이 일찍부터 이 문자를 사용했던 것은 일본서기에 이 문자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마니시 류, 의 기문반파고, 1922년 ]
출처 : 이덕일의 역사TV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당이 백제를 평정하고 “금물”을 “기문”으로 고친 기록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경덕왕때 “금무”로 고쳤다는 내용도 사료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 “백제인이 일찍부터 이 문자를 사용했던 것은” 이 내용도 백제가 일찍부터 이 문자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마니시 류는 자신이 그냥 주장하면 그것이 곧 역사 사료라고 생각한다. 당나라가 고쳤다면 고친것이고, 백제가 사용했다면 사용한 것이다. 이런 사람이 무슨 역사학자란 말인가?
고로 중국사료나 한국사료 어디에도 “기문” 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모두가 새빨간 거짖말로 보여진다.

[ 이미지 출처: 이덕일의 역사 TV ]
위 “흙방울 토기” 는 6가야를 표현하는 토기이다. 2019년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이다.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고녕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이렇게 6가야를 표현한 것이다. 고로 가야는 무조건 6가야가 정답이리고 본다.
왜? 가야가 12가야나, 22가야라면 흙방을 토기를 12개나 22개를 만들었겠지.. 그런데 6개만 만들었다는 것은 가야가 6가야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주장들은 다 허구라고 보고싶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가야를 12국이라고 써놓았다. 그리고 가야의 다른 이름으로 아래와 같이 기록해놓고 있다.
가야(伽倻), 가야(伽耶), 가라(加羅), 구야(狗邪), 가락(駕洛), 임나(任那)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은 어느나라 백과사전인가? 왜 가야의 다른 이름으로 한창 문제가되고 있는 “임나”라고 기록해 놓았는가? 혹시 “식민지문화대백과사전”을 잘못 해놓은건 아닌가? 의심스럽다.

일본서기에는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떨어져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 서남쪽에 있다(일본서기, 숭신 65년조) 라고 기록되어있다.
북한학계에서는 가야가 일본에 진출해서 분국을 세운 것이 임나일본부이다라는 분국설을 주장하고 있다. 남한 민족사학도 분국설을 주장한다.
출처 : 이덕일의 역사 TV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위 “일본서기”를 “연대부터 맞지 않는 거짖 역사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위 “일본서기”에 임나에 대해 정확히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고 분명히 기록해놓았다.
“일본서기” 가 “임나”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이 역사책에는 “임나”를 제대로 기록했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그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일본서기”가 연대는 다소 틀리지만 이런 부분은 또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 “임나” 나 “기문”이나 모두 일본땅에 있는 것일테다. 식민사학자들이 이들 용어를 전부 가야나 백제에서 찾으려니 지금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북한 역사학자들이 “임나”의 위치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위 박스속의 내용을 보면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가야와 백제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라면 그 북쪽에 바다가 있는가?? 그래서 “일본서기” 의 “임나” 설명이 정확하고 그에반해 일제식민사학자들은 그 해석을 잘 못 하고 있는 것이다.

[ 출처: 이덕일의 역사 TV]
위 지도를 보면 남한 민족사학계와 북한학계가 지목하는 지역이 “기문”이라야 “일본서기”에 나오는 말이 이해가 된다.
“축자국에서 2천여리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 위 지도를 보면 이해가 간다. 정확히 북쪽이 막혀 있으려면 북한학계에서 주장하는 지역이 가장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남한 민족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지역은 정확히 말하면 북서쪽이다.
“일본서기”가 우리나라 “삼국사기(1145년)”나 “삼국유사(1281년)” 보다 더 오래된 역사서이다. 그래서 훨씬 더 그 사료 내용이 정확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가 멸망하던 당시에 쓰여진 역사서이니 당연하다.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있으려면 작성 연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내용이다. 무릇 역사서는 그 사료적 가치를 가지려면 주변국들의 역사서와 비추어 보아 그 타당성이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서기”는 그 연대부터가 맞지 않고 그 내용 또한 우리의 역사 사료와 중국의 역사사료와도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이런 역사서를 단지 작성 시대가 앞섰다고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그런 반면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무려 140년 가까이 작성연대가 차이나는데도 일치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하물며 날자까지 일치된다. 그렇다면 “일본서기”를 사료로서 참고할 것인가 아니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사료로서 참고 할 것인가?
그래서 “일본서기”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역사서로 “이마니시 류” 이전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대해 의심을 품었고 조선 사료들을 참고해서 고대사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무엇인가?
야마토왜의 신공왕후가 서기 369년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562년까지 지배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즉 백제와 가야는 야마토왜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미 야마토왜가 가야를 그렇게 옛날부터 지배했기 때문에 일제 식민지시대 때 일본은 남한을 식민지배해도 당연한거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임나일본부 설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즉 정한론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체계화 한 것이다. 일본군에서는 반도를 식민지배 하려면 국제사회에서 비난을 받을것을 우려해 역사를 조작했다고 본다.
“우리 대일본제국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식민지배 한것인데 지금 20세기를 맞이하여 원래 우리가 지배했던 반도를 다시 우리의 지배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 위해 군부를 중심으로 한 극우 제국주의자들이 앞장서서 반도의 역사를 조작해놓은 것이다.
일본 역사학자 “나이토 토라지오”의 고백

[ 이미지 출처: 이덕일의 역사 TV ]
“나이토 토라지오의 고백” 이다.
“원래 아방(일본)의 고대사 연구가는 <일본서기>의 기년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유력한 방증으로서 조선고사의 기년을 참고하고 더욱이 그 기사의 내용까지도 조선고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지만” 으로 토라지오는 이미 “일본서기”가 연대부터 맞지 않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이런말도 했다. 1921년(다이쇼 10년) “오닌의 난에 관하여” 라는 강연을 하면서.
대체로 오늘 일본을 알기 위해 역사 연구하는 것에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 이전의 일은 외국의 역사와 같은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오닌의 난 이후는 우리의 진실한 신체 골육에 직접 닿는 역사이어서, 이를 진실로 알고 있으면 그것으로 일본의 역사는 충분하다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 글 출처: 위키백과
“오닌의 난” 은 1467 ~ 1477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내란으로 일본전국 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기에서 나이토 토라지오는 “일본 고대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이전의 일은 외국의 역사와 같은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
과연 “일본서기”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야마토왜” 가 한반도의 “가야와 백제”를 약 300년 가까이 식민지배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이토 토라지오” 가 연설에서 저와 같이 발언을 했을까?
아마도 나이토 토라지오는 “일본 고대사는 우리가 반도의 가야와 백제를 식민지배 했던 그때를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그때를 많이 연구해야 합니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
고대 한일관계사 남한 최고의 학자 고 최재석 박사
고 최재석 교수는 고대 한일관계사 300편 논문과 30권의 학술저서를 썼다.
1926년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학교와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하버드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 한국사회사 분야의 저서로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 『한국가족연구』 『한국농촌사회연구』 『제주도의 친족조직』 『현대가족연구』 『한국가족제도사연구』 『한국고대사회사방법론』 『한국고대사회사연구』 『한국농촌사회변동연구』 『한국 초기사회학과 가족의 연구』『한국사회사의 탐구』 『한국의 가족과 사회』 『Social Structure of Korea』 등, 고대 한일관계사 분야의 저서로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과정』『일본고대사연구비판』 『통일신라·발해와 일본의 관계』『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고대한일불교관계사』『일본고대사의 진실』『고대한국과 일본열도』 『고대한일관계와 일본서기』 『고대한일관계사 연구』 『일본서기의 사실기사와 왜곡기사』 『Ancient Korea-Japan Relations and the Nihonshoki』(Oxford: The Bardwell Press) 등 수십 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제1회 한국사회학회 학술상, 제46회 3·1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고 최재석 교수 소개 출처 : 교보문고 인물,작품 편
남한 역사학계에서 단연코 한일 고대사연구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자이시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국내에 고 최재석 박사처럼 훌륭한 역사학자가 있으니 그 분의 연구성과를 소홀히 하지 말고 학술저서에 두루 참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연대부터 어설픈 “일본서기”는 믿고 따르면서 왜 이와 같이 훌륭한 우리나라 역사학자와 우리 선조들이 기록한 최고의 문화유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소홀히 하는가?
진정한 역사학도라면 대충 연필로 지도를 그릴 것이 아니라 철저한 사료 검증을 거쳐 역사서를 집필하고 논해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에 “탁순” 이 대구의 옛 지명 “달구벌” 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탁순” 을 대구라고 비정하는 그런 엉터리 역사학이 아니라 가장 많은 사료를 가지고 있는 중국과 우리나라 고대 사료를 철저히 찾아내어 올바른 역사서를 집필하고 그런 역사서를 가지고 우리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을 시켜야 할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라고 했는데 역사를 잊은것도 모자라 있는 역사까지 조작하고서야 무슨 낯으로 민족앞에 역사학자라고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릴 것인가?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