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이 되어도 서기 108년 한이 고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한4군에 대해 식민사학계와 민족사학계는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중국땅인 고대요동과 한반도 북부 평양을 두고 주장이 엇갈린다. 낙랑군이 실제했었던 그 당시의 중국 사료를 살펴보면 간단하게 해결 될 일이다. 각각의 주장들을 살펴보자.
서기 108년 “낙랑군”에 대한 현대의 여러기록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낙랑군의 위치는 한반도 북부 지금의 대동강 유역에 있다는 것이라고 배웠다. 국내 사학계의 통설은 대동강 유역설이다. 이른바 강단사학으로 불리는 이병도·이기백·노태돈의 입장이다. 이에 맞서 이른바 민족사학으로 묶이는 학자들의 견해는 요동설(신채호), 요서설(정인보· 북한학자 리지린·윤내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의
고조선시대에 한나라가 우리 나라의 서북부지역에 설치한 낙랑(樂浪) · 임둔(臨屯) · 진번(眞蕃) · 현도(玄菟)의 4개의 군현.
낙랑군은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이와 같이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복 후, 일제에 의해 왜곡, 날조된 한국사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한사군문제도 재조명되었다. 그 결과, 한사군은 낙랑군을 제외하면 존속기간이 불과 25년 정도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가장 늦게 멸망한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좁은 지역에서 이름만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와 같이 한사군은 일제에 의해 그 실체보다도 확대 해석되어 지금까지도 한국고대사의 인식을 그르치게 하는데 영향을 끼쳐왔고, 광복 후에야 비로소 그 바른 모습이 밝혀졌다. 한사군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구분상의 어떤 중요한 기점이 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역사술어로서도 타당성이 결여된 비과학적인 용어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도데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광복 후에야 비로소 그 바른 모습이 밝혀졌다” 라고 했는데 이어서 한사군은 역사술어로서도 타당성이 결여된 비과학적 용어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한사군”은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개의 군현으로 그 이름이 “한사군” 이라는 용어로 부르는데 비과학적 용어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역사 용어이지 역사 용어가 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찌되었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는 “낙랑군”이 한반도 북부 대동강 유역에 있다고 설명해 놓았다.
나무위키에 기록된 낙랑군 위치
낙랑군 - 기원전 108년 ~ 313년. 한사군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는 행정구역.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수복됨.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문헌 사료만 가지고 일부 학자들이 한사군의 위치를 놓고 다른 곳으로 비정하는 일이 있었으나, 대다수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지리지> 등)이나 《고려사》 등 국가의 공인 사서 및 지리서, 그외 저명하고 가치 있는 사서들은 모두 평양 일대가 낙랑군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학계에서 낙랑군이 평양에 없었다고 보는 학자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사실상 논쟁이 끝난 상황이다.

[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서기 108년 한의 4군현” ]
“주류학설”과 “비주류학설”은 이해가 가는데 “유사역사학설” 은 또 무엇인가? 어찌되었던 인터넷 “나무위키”에도 보면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다고 기록해놓고 있다.
그리고 “낙랑군”이 313년에 멸망했다고 되어있는데 중국 사료들을 보면 그 이후에도 “낙랑” 과 관련된 역사가 계속 나온다. 분명히 313년에 멸망했는데 중국 사료에 계속 낙랑에 대해서 역사가 이어지는 내용들이 나오는것을 보면 뭔가 수상하다.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
대체로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특별히 없고 일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위에서 언급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나무위키’ 만 보아도 나머지 여타 국내 식민학자들의 주장은 거의 대동소이하니 더 언급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낙랑군의 요동, 요서설
민족문화연구원장 심백강 박사의 주장
20년 동안 고조선과 고구려 강역 연구를 해온 재야 역사학자 심백강(역사학 박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은 최근 펴낸 책 <사고전서 자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역사)에서 민족사학의 요서(랴오허 서쪽)설에서 더 서쪽으로 나아간다.
“낙랑은 한반도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현 중국 허베이(하북)성 남쪽 지역에 발해를 끼고 있었다. 즉 허베이성 동북부에 있는 강인 난하 중·하류 유역으로부터 서쪽으로 허베이성 남쪽 역수 유역의 갈석산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발해만을 끼고 펼쳐져 있었다.”
20년 동안 고조선과 고구려 강역 연구를 해온 역사학자 심백강(역사학 박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은 자신의 저서 『사고전서 자료로 보는 한사군의 낙랑』<바른역사>에서 민족사학의 요서(랴오허 서쪽)설에서 더 서쪽으로 나아간다.
심백강 박사의 주장은 낙랑군 등 한사군이 발해만을 끼고 펼쳐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책 서두에서 2012년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발간한 ‘한반도 역사’ 보고서에 들어간 동북아역사재단의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자료가 ‘한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으며 낙랑군은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논지를 폈고, 올 초 이 재단이 발간한 <한국고대사 속의 한사군>이란 책도 한사군의 한반도 북부 위치설을 펴 기존 대동강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이덕일의 주장
이덕일 소장은 “한나라는 위만조선의 서쪽 일부 강역에 낙랑, 현도,진번,임둔 4개의 군을 설치했는데 그 위치를 두고 논쟁이 되어왔다.
특히 대일항전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의 강역을 반도로 가두는 반도사의 틀로 한국사를 조작하면서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남쪽에는 왜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일제가 패전해서 쫓겨 간 후 지금까지도 이런 주장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덕일 소장이 주필로 참여하고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에 나오는 낙랑군에 대한 설명을 보자
일본인 학자들은 한사군의 중심인 낙랑군이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게 쫓겨 갈 때까지 지금의 평양에 있다고 주장했다. 현도는 압록강 중류지역, 진번은 황해도 또는 경기도, 임둔은 강원도 등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인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양으로 주장한 것은 조선 후기 사대주의 유학자들의 주장을 악용한 것이었다. 유학자들은 기자가 평양으로 왔다는 기자동래설에 따라서 기자조선이 평양에 있었으니 위만조선도 평양에 있었고 그 자리에 다시 한사군이 들어섰다고 본 것이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주장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거의 1800여 년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낙랑군의 위치를 알려면 낙랑군이 실제로 존재했던 시기에 편찬한 중국 역사서들의 내용이 중요하다.
북한 학자 ‘리지린’은 “기자” 라는 것은 인명이 아니라 중국의 어느 지역의 지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남북 역사학자를 통틀어 가장 많은 중국 고대사료를 검토한 학자이며 중국 ‘고사변학파’의 “고힐강” 박사 조차도 ‘리지린’의 논문을 심사하다가 자신의 부족한 중국사료 공부를 새롭게 할 정도로 ‘리지린’은 중국 고대사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검토한 학자로 유명하다.
이런 ‘리지린’ 박사가 “기자”가 중국의 여러 사료에서 “기자”는 인명이 아니라 어느 지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내용
더구나 최근 북경시 대흥구의 고대 무덤군을 발굴하던 중 동위 원상 2년 사망한 한현도에 대해 "낙랑군 조선현 출신" 이라고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다. 낙랑군은 처음부터 평양에 있지도 않았고 313년 멸망하지도 않았다. 위만조선 강역의 일부였던 하북성 일대에 있다가 더 서쪽 지금의 북경 부근의 유주로 옮겨 갔다 -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77P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임둔군이 지금의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1997년 요녕성 서쪽 금서시 연산구 태집둔에서 '임둔태수장"이라고 쓴 봉니封泥가 발견되었다.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모두 지금의 요녕성 서쪽과 하북성 일대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료들이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77P
참고: “봉니” 란 진나라부터 위진 때까지 공문서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인장을 찍은 것을 말한다.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인 중국 사료가 말하는 낙랑군 위치
중국의 【위서魏書 】
북위의 세조 태무제가 432년 "영구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菟, 여섯 군의 백성 3만 가구를 유주( 현 북경)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76P
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과 “나무위키” 에 기록된 낙랑군은 분명히 313년에 멸망했다고 되어있는데 , 중국의 사료에서는 북위의 세조가 432년에 “낙랑” 을 현재의 북경으로 백성들을 옮겼다고 나온다.
도데체 어떻게 된 것인가? 멸망한 낙랑군을 북위의 세조가 어떻게 옮겼는가? 그것도 낙랑이 멸망하고 119년뒤에 옮겼다니 뭔가 이상하다.
“북위” 라면 “낙랑군”이 멸망하던 시기의 국가 이름인데 뭔가 이상하다.
서기 432년이면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럼 북위의 세조가 고구려까지 쳐들어와서 평양일대에 거주하는 낙랑군 백성들을 지금의 북경으로 옮겼다는 말인가?
고구려 왕에게 가서 세조가 “내가 낙랑군 백성들을 북경으로 옮겨야 하니 고구려 왕께서는 그냥 조용히 계십시요” 하고 백성들을 데려갔다는 말인가?
중국의 【 태강지리지 】
진이 중원을 통일하고 기념으로 만든 적국 지리지가 바로 ‘태강지리지’이다. 이 ‘태강지리지’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다른 역사서에 그 내용이 전한다.
“온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113P ‘더 깊게 생각하고 토론해 봅시다’ 글박스 속의 내용을 보면,
《 태강지리지 》가 말하는 낙랑군의 위치
진晉에서 중원통일 기념으로 만든 전국 지리지가 《 태강지리지 》이다. 《 태강지리지 》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여러 역사서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그중 《 사기 》< 하본기 > 주석에 《 태강지리지 》를 인용해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곳이다." 라고 하였다. 진晉 나라의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그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수성현은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 있었고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있다. 이 또한 낙랑군이 북한 평양이 아니라 고대 요동인 하북성 일대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 출처: 구글지도 ]

[ 지도 출처 : 구글지도, “서기 108년 한이 고조선을 멸하고 한4군을 설치한 지역으로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 ]
식민사학자들은 ‘낙랑군’이 평양 대동강 유역에 있다고 했는데 중국 사료들은 한결같이 낙랑군은 중국 요동지방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식민사학자들이 낙랑 평양설을 주장하다보니 결국 중국사료에 나오는 “수성현” 도 평양부근에서 찾았을 것이다. 평양 부근에 수성현이라고는 우리 역사서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중국 사료에도 한반도에 ‘수성현’이 있다는 내용은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또한,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주장하다보니 최근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하면서 만리장성이 동쪽 평양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하니 이에 식민사학자들은 중국의 주장에 반박을 할 수가 없다. 자신들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고 했는데 만리장성도 평양에서 시작해야하고 또 북위의 세조가 432년 낙랑 백성들을 유주로 옮겼다는 내용도 만리장성이 평양에서 시작해야 앞뒤가 맞게된다.
만리장성이 평양에서 시작했다면 지금도 그 만리장성이 평양에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계속 중국으로 이어져야하는데 지금 한반도 북부 어디에도 만리장성의 흔적은 1도 없다.
그러니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주장과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은 모두 거짖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명백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학자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에 나타난 《낙랑》
리지린은 북한 학자로서, 1936~41년까지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에서 중국철학을 전공했으며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해방 후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법대 전신)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8년 3월경부터 북경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고사변학파의 고힐강을 지도교수로 고조선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61년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리지린의 지도교수 중국의 고힐강교수는 고사변 학파의 중심 인물로써 그는 “낙랑군=평양설” 을 지지하는 중화사학자였기 때문이다. 고힐강은 위만조선의 도읍이 대동강 남쪽에 있었고, 따라서 낙랑군도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북한에서 유학을 온 리지린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고힐강 교수는 리지린의 박사학위 논문을 통과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리지린이 워낙 방대한 중국사료를 철저히 검증해서 논문을 집필했기 때문에 자신의 지식으로 논문에 대해 반박할 수가 없었다.
고힐강교수는 리지린의 박사학위 논문을 검토하면서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조선의 유학생을 위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4사의 동이전을 세밀하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나도 적지 않은 수확이 있었다" 라고 했다. 또 고힐강 교수는 "오늘의 시험은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다. 국제적인 우호관계를 위해서 그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켜야한다" 라고 말했다.
리지린의 견해를 반박할 수 없었던 자신의 학문적 한계를 애써 정치적인 결정 때문으로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라고 이 책의 해역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해제에서 말하고 있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중에 나오는 《낙랑》관련 내용들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후한서》1권 <광무제기> 건무 6년 6월 조의 《처음에 낙랑사람 왕조가 (낙랑)군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다》에 대한 당나라 사람 리현의 주에는 《락랑은 본래 조선국이다. 료동에 있다》이라고 씌여 있다. 주지하는 바 리현은 중국의 력대 주석가들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로인정되는 학자이다. -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77p~78p -
《 위서 》 106권 지형지 북평군 조에는 < 북평군이 거느리는 현은 둘이다....조선현과 신창현이다> 라고 쓰여 있고, 조선현에 대한 주석에는 < 전한,후한과 진나라 때는 낙랑군에 속했는데, 후에 폐지했다. 연화 원년 조선 백성을 비여로 옮겼는데 후에다시 현을 설치했다
이 지역에 고조선의 지역 명칭 즉 <락랑>이란 지명이 보인다. 명대의 곽조경의 <로룡새략>에서는 연산(즉 오늘의 산해관과 련결되는 산) 일대를 <락랑> 이라고 칭하고 있다.-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119p ~ 120p -
《 진서 》14권 <지리지> 락랑군 수성현 <주>에는 <진나라에서 쌓은 장성이 시작하는 곳이다> 라고 썼다.
《 통전 》186권<변방>2 <동이,고구려> 조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만리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한다. 지금 증험해보니 장성은 동쪽으로 료수를 자르고 고려로 들어가는데 , 그 유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라고 썼다. 즉 <진서> 와 <통전> 에서는 진 장성의 동단을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130p - 131p -
《통전,안동,대도호부》조에 《안동대도호부는 순임금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를 설치하고 목을 두었다. 료수의 동쪽은 마땅히 이곳이다. 춘추 및 전국 때는 함께 연에 속했고, 진나라와 전한,후한 때는 료동군이었는데, 동으로 락랑군과 통한다》라고 쓰고 그를 주석하여 《락랑은 본래 (고)조선국이다. 한 무제 원봉 3년(기원전 108년) 조선인이 그왕의 목을 베고 항복해서 그 땅을 락랑군으로 삼았다. 현토군과 다시 대방군을 설치했는데, 모두 료수의 동쪽에 있다》라고 썼다.- '리지린의고조선연구' 141p -
《로룡새략》(명, 만력, 경술 각본) 13권 전부 《황렬전》에 이것을 말해 주는 기록이 있다. 즉 《임진은 죽었지만 그 죽은 바를 능히 밝히고, 제사를 높여 숭상하니 연산, 낙랑 사람마다 감격하여 분발하기를 바라니 어찌 호로를 걱정하겠는가》라고 씌여 있다. 연산산맥은 란하를 건너 갈석산으로 향하여 뻗어 나간 산맥이며 그것은 대체로 오늘의 만리장성 줄기와 일치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료에 근거하여 연산 부근 일대를 《락랑》이라고 칭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리지린의 고조선연구, 169p ~ 170p-
《낙랑군》을 두고 싸우는 이유
뭘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4군(낙랑군, 임도군, 현도군,대방군)은 모두 중국땅에 있었다.
바로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낙랑군이 평양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제국주의 시절에 한반도를 식민지배 하기 위해 또 그 정당성을 찾기 위해 한반도 북쪽은 중국이 지배 했고, 한반도 남부는 고대 일본의 야마토왜왕이 지배 했으니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반도를 침략해서 식민지화 하는데는 하등의 잘못이 없다는 이유다.
쿠데타를 하는 군인은 자신이 쿠데타를 하는 이유를 민주주의 확립이니 경제발전을 위해서니 온갖 핑계를 갖다 붙인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이유가 있는 것처럼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면서 고대로부터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 했기 때문에 원래 고대로부터 지배했던 것을 복원 한다는 것이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자신들이 러일전쟁 당시 독도를 발견했고 그때부터 일본 어민들이 그곳에서 조업을 했다고 증거를 들이댄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국 만주, 대만,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들을 제국주의 시절에 점령했었다. 그리고 1945년 2차대전에서 패망한 후 이 모든 지역에서 철수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나무위키에 나와있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을 살펴보면,
태평양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을 포함한 48개국이 강화 회의 후 체결한 일본과 연합국 간의 조약이며 1952년 4월 발효되었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대일강화조약 등으로도 불린다. 이 조약으로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였던 일본이 공식적으로 국권을 회복하였다. 또한 일본이 자국 독립의 조건으로 한반도에 관한 모든 권리를 명시적으로 포기하면서 한국의 법적, 외교적 독립을 확인하였다.
1.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2. 일본은 타이완과 펑후제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3. 일본은 쿠릴 열도에 대한 그리고 일본이 1905년 9월 5일의 포츠머스 조약에 의해 주권을 획득한 사할린의 일부와 그것에 인접한 도서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4. 일본은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제도와 관련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하고, 신탁통치를 이전에 일본의 위임통치권 하에 있었던 태평양 제도에 이르기까지 확대하는 1947년 4월 2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조치를 수용한다.
5. 일본은 일본 국민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건, 아니면 그 밖의 활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건 간에, 남극 지역의 어떤 부분과 관련된 어떠한 권리나, 소유권 또는 이익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
6. 일본은 남사군도와 서사군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제국주의 시절에 점령했었던 지역들을 이 강화조약으로 모두 반환하게되었다. 그러면, 당연히 제국주의 시절에 점령했던 지역이라면 그 나라와 부속도서들을 모두 반환해야한다.
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1조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라고 되어있다.
"일체의" 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비록 제1조에서 "제주도,거문도,울릉도" 3개의 큰 섬을 언급해놓았지만 이는 대표적인 큰 섬들을 언급한 것이고 비록 "울릉도" 옆에 코딱지 만한 작은 섬 "독도"를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일체의" 라고 하며 모든 권리와 소유권, 청구권을 포기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럼 거문도와 제주도 옆에 코딱지 만한 섬들은 왜 자신들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구 주장했으면 거문도, 제주도 옆에 있는 작은 섬들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해야 하지 않는가??
근데 왜 일본은 지금도 동해의 “독도”를 자기들 소유라고 주장하나? 제1조에서 “독도”란 명칭이 빠져서? 아니면 무슨 이유인가?
“독도”를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하려면 필리핀 군도의 그많은 섬들과 인도네시아의 그 많은 섬들도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해야지? 왜 유독 “독도” 를 가지고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하는가?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점령했던 모든 지역은 당연히 그 명칭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반환 한 것이다. 지금 일본은 제국주의 헌법이 아닌 이상 당연히 자신들이 지배했던 모든 지역의 티끌 하나라도 모두 반환 한 것이된다. 그기에는 그 어떤 역사적 증거가 있던 지도가 있던 의미가 없다. 제국주의국가에서 패망했으면 제국주의 국가시절에 점령했던 모든 지역은 당연히 제국주의가 끝나면서 그 지배권도 끝난 것이다. 아직도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 이며 “제국주의 헌법” 을 가지고 있는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왜?
고대 중국사료에 그대로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짜 유물을 평양지역에 묻어놓고 여기가 낙랑이니 하는 따위의 주장은 살펴 볼 가치도 없다. 평양 주변에 “대충 화강암 돌덩이 하나 가져다 대충 글 새겨서 비석을 세워놓고 이것이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다” 라고 해봐야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고대 중국의 모든 사료가 하나같이 말하고 있다.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당시의 중국 고대 국가들의 역사서가 사실을 기록하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1,000년뒤의 조선시대 ‘정약용’과 같은 유학자들의 견해가 사실에 가까운가?
결론
“낙랑군”을 비롯한 한4군현은 지금의 중국땅에 있었다. 이는 명백하다고 본다.
아무리 후대의 똑똑한 역사가가 이런저런 구실을 들어가며 또 전문용어를 들추어 가며 역사를 조작해도 이미 지나간 과거 역사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왜? 당시 사람들이 그 시대를 이미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지명’과 ‘인명’ ‘위치’ 등에 대해 후대학자들이 조금씩 해석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그 일관된 진실은 하나로 맥을 같이 하고있다.
“낙랑군”에 대한 주장도 마찬가지다. 과거 조선시대 정약용이나 이런 조선후기 유학자들이 더러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들 조선 유학자들보다 수백 년 앞선 중국의 학자들은 온갖 기록들에서 낙랑이 중국 땅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약용’이 북한학자 ‘리지린’ 처럼 중국의 고대사료를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보지는 못햇을 것이다. ‘정약용’이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10년동안 고대사를 연구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저 전해오는 몇 권의 역사서를 보고 주장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얍삽한 일제 식민사학을 공부하고 그대로 추종하는 학자들이야 말로 국적을 떠나서 학자로서의 양심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죽어서 저승에 가면 조상님들이 뭐라고 할것인가?
“너 같은 양심을 팔아먹은 역사학자를 후손이라 하기가 쪽팔린다 어저 썩 꺼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