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후반 영정조시대는 조선후기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비교적 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고 배웠다. 그러나 그 시기 조선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사도세자의 죽음(임오화변)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한중록과 영조실록을 보면서 과연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 이미지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통령령에 따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991년 출간한 백과사전이며 현재 총 28권으로 구성됨]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에 기록된 한중록에 대한 간략한 설명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한중록'에 대한 설명]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洪鳳漢)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회고록이라고 하였고 총 4편으로 1편은 정조말기에 쓰여지고 나머지 3편은 정조 사후 순조임금 시기에 쓰여졌다고 한다
제4편에서 본격적으로 임오화변의 진상을 폭로하고 있으며 세자가 공무를 태만히 하고 무예놀이를 즐기고 이런 사유로 영조는 세자를 점점 더 미워하게되었으며 영조를 무서워한 세자는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설명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혜경궁 홍씨는 세자가 10살경부터 정신병적인 행동을 했고 이후 영조와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온갖 정신병적인 행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세자가 갖혀 죽은 뒤주는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친정 아버지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과연 사실인지 뒤에서 영조실록을 통해 살펴보자
“나무위키”에 기록된 ‘한중록’의 역사적 가치평가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직접 증언을 저술한 만큼, 사도세자 관련 문제에서는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사도세자의 광기나 뒤주에 갇혀 죽은 이야기 등을 서술했다.
2번째 집필한 부분부터 남편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미친 사람으로, 시아버지 영조를 편집증적인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다른 여러 사료에도 이와 일치하는 기록이 많다. 그리하여 임오화변의 전말을 밝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았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너무 간략하고 승정원일기는 정조가 세초시켜 한중록을 제외하면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임오화변을 노론이 꾸민 음모라고 주장하는 노론 음모론자들이 이 점을 과다하게 부풀려서, 마치 "혜경궁 홍씨마저 사도세자 죽이기에 참여해놓고 한중록에서 이를 미화했다"고 주장하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정치권력 싸움에서 풍비박산나는 것을 감싸고 옹호한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것이 노론 음모론의 근거로 연결되기에는 부족하다. 아래의 정신과 전문의들의 분석을 봐도 그렇고. 또한 위에 언급한 세자의 광증이나 친소론 논란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해명이 가능하다는 해석도 있다. 이 부분은 사도세자 및 임오화변 문서에 있다. 즉, 결론을 내리면 한중록은 다른 사료에도 꼭 필요한 교차검증 및 사료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충분하며, 내용 전체를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
[ 정하은&김창윤(2014년)'사도세자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 양극성 장애 환자인가 당쟁의 희생양인가. Korean Neuropsychiatr Assoc, 53(5),299~309.에 따라 정신과 의사의 연구결과를 인용해서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 나무위키에 나타난 임오화면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첫째, ‘한중록’은 사도세자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라고 표현하고 있다.
둘째, 임오화변을 노론과 관련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고 이는 노론 음모론자들이 과다하게 부풀린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셋째, 현대 정신과 전문의가 봐도 사도세자가 양극성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있다
넷째, 한중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즉 정신과 전문의가 봐도 한중록 속에 나타난 세자의 정신병적 행동은 입증이 된다고 하고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중록이 1차사료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나무위키” 는 누가 작성하는가?
구글에 ‘나무위키는 누가 작성하는가’ 라고 검색을 해보면 아래와 같다. 그 내용을 간략히 옮겨보자
세계 1위 검색 엔진인 구글에서 검색 시 나무위키가 최상단에 뜨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접근성과 파급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터넷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이용자들도 쉽게 나무위키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나무위키는 위키입니다. 위키란 여러 사람들이 각자가 가진 정보를 문서 생성 및 편집을 통해 공유할 수 있도록 한 웹사이트를 말합니다.
즉 나무위키는 집단지성을 만들어가는 체계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에는 반드시 그 기초사료를 바탕으로 작성해야한다고 되어있다. 인터넷에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고 있는 사이트다.
위 ‘나무위키’에 기록된 사도세자 관련 글을 보면 이는 일반인이 작성했다고 보기에는 그 전문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누가 나무위키에 임오화변 관련해서 글을 작성했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추측해보면 현 대학 역사학과 대학교수나 퇴직한 역사학과 대학교수 정도는 되어야 쓸 수 있는 내용들이라고 추측된다.
영화 “사도” 는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시나리오가 제작되었나?
2015년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영조 역으로 송강호, 세자역으로 유아인이 열연했다. 제52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유아인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 제4회 바르셀로나 아시아영화제에서 사도가 파노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 제47회 인도국제영화제에서도 영화 사도가 은공작상 즉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그 외 각종 시상식에서 여러부문에서 상을 받았으며 그로인해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영화 ‘사도’를 시청한 관객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
영화를 감상한 관객수는 현재까지 약 600만명을 넘어섰다. 단순 극장에서 정식 티켓을 구매하여 감상한 관객수이며 기타 무료 영화채널이나 유튜버 영화소개, 각종 인터넷 포털, 넷플릭스, 티빙 등 이 영화를 감상한 관객수를 종합하면 대한민국 거의 대부분이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시청한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이 주인공 “사도세자”가 ‘한중록’의 기록대로 정신병이 발병하여 점차 강도를 높여가다가 급기야 임금 영조에게까지 칼을 들고 나타나는 정신병자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 한편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가 세자를 “정신병자”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만큼 영화, 텔레비젼 등 미디어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위 나무위키에서도 보았듯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자의 정신병적인 행동들이 몇가지 나오지 않는다며 가장 중요한 1차사료를 소홀히 하고 있다. 이미 세자를 정신병자로 보고 영조실록에서 정신병적인 언행을 찾으려니 당연히 몇 개 밖에 것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왕조실록 속의 사도세자

[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
영조실록(英祖實錄)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 이금(李昑) 재위(1724년 ~ 1776년) 51년 8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총 127권 8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식 명칭은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실록(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實錄)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이 죽으면 다음 임금이 실록청을 세우고 대신들을 임명해 선대 임금에 대한 실록을 기록한다. 사관들이 기록한 승정원일기, 각 대신들의 각종 상소 등 문서, 임금이 반포한 각종 정책과 문서 등을 종합하여 실록을 기록하며 임금과 신하들이 주고받은 대화들이 적나라하게 표기되어있는 살아있는 역사 사료라 할 수 있다.
왕조실록은 임금이라해도 직접 볼 수는 없으며 만일 임금이 보고자 한다면 그 일부를 필사해서 볼 정도로 비록 임금이라도 직접 실록 기록에 관여할 수 없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역사서라 할 수 있는 이유다.
그래서 임금이 움직이면 항상 사관들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 초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 태종은 주변 신하들에게 “사관이 모르도록 해라”라고 하였으나 사관들은 태종이 했던 말까지 그대로 기록해두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이 세계최고의 편년체 역사서이며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조선왕조실록 영조대에 실린 세자의 모습을 살펴보자
세자 선이 10살 때 지은 시를 보자
해는 동쪽에서 솟아 사해四海를 밝히고
달은 중천에 솟아 만산萬山을 비추도다
여기서 해와 달은 국왕을 상징하며 이 해와 달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 당파만 비추는 존재가 아니라 사해와 만산을 비추는 존재였다. 즉 한나라의 국왕은 모든 신하와 백성들을 두루 살펴야 한다는 세자의 기본 성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요즘 열 살이면 초등학교 3학년인데 만나이로 쳐도 초등학교 4학년이다. 지금 초등학생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하면 과연 저런 시가 나올까 ?
조선시대이고 어릴적부터 한문 공부를 하고 옛 선현들의 글구를 보며 자랐다고 하더라도 열살의 나이에 저런 웅혼한 시를 지었다는 자체가 그저 놀랍기만하고 고구려 시대 광개토대왕의 기상을 보는 듯 하다
실록에 나와있는 세자의 언행을 조목조목 살펴보자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 12월 14일 경자 1번째기사, 대신들이 청대하고 선화문에 나아가 아뢰다가 노여움을 사다 ] 이는 영조가 또다시 양위소동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종성이 여러 신하들과 같이 극력 간하자, 임금이 또 육아편(蓼莪篇)을 읽었다. 그리고 《춘방일기(春坊日記)》를 가져오게 하여 승지로 하여금 세제로 책봉하였을 때 사양하였던 상소인 사세제책봉소(辭世弟冊封疏) 세 편을 읽도록 하였는데, 밤 3경에 이르렀다. 왕세자가 팔짱을 끼고 임금의 앞에 서있었는데, 임금이 손으로 휘저으며 가도록 하고 말하기를,
"너는 무엇 하러 나왔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므로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내렸던 전교를 반한(反汗)하겠다."
하고, 이어서 육아시를 읽어 끝 편에 이르자, 왕세자가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참고: 밤 3경은 밤 11시 ~ 새벽 1시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 12월 15일 신축 4번째기사, 영조가 양위소동을 또다시 벌이면서 궁궐이 시끄러웠다. 이때 세자는 추운 겨울 차가운 바닥에 거적을 깔고 대죄하고 있었다. 무려 13일을 버틴 후에야 양위소동을 멈추었다.
왕세자가 드디어 합문 밖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삼가 신이 너무나도 불초한 사람으로 외람되게 대리하라는 명을 받들고 나서 주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차마 듣지도 못할 하교를 갑자기 받고 나니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마치 깊은 연못으로 떨어진 것과도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신이 불효하고 무상하여 어젯밤에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신의 죄입니다. 당장이라도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으나 되지를 않습니다. 아! 성상의 계책이 충실하시어 교화가 팔도에 두루 미치었는데, 갑자기 망극한 분부를 내리시니, 마음 속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아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잠시라도 어찌 차마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 감히 만 번 죽음을 무릎쓰고 문 밖에 거적 자리를 깔아 놓고 엎드려 우러러 성상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있으니, 신은 더욱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정원에 내린 하교를 빨리 거두셔서 종사를 중히 하소서. 그러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왕세자가 또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소를 올려 애타는 고충을 털어놓았으나, 효성이 얕아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이키지 못하였습니다.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도 우러러 감동시키지 못하여 윤허를 내리시지 않으시고 차마 듣지도 못할 하교만 잇따라 내리시니, 가슴이 내려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지금 성상의 뜻이 비록 완고하시지만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은 오직 죽음 뿐입니다. 망극한 하교를 들은 이상 반드시 죽음을 무릅쓰고 극력 청하여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하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마음 역시 완강하다는 점을 굽어살피시고 빨리 유음을 내리시어 어제의 하교를 반한(反汗)하심으로써 종묘와 사직을 중히 하소서. 신이 장차 문 밖에 나아가 엎드려 있으려는 즈음에 갑자기 엄한 하교를 듣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여 감히 그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억지로 물러나와 거적자리에 엎드려 명이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면서 감히 재차 성명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어리석은 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며 흐르는 눈물과 애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 12월 17일 계묘 8번째기사,
왕세자가 합문 밖에 나아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아뢰기를,
"어제 삼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받고 감히 나오지 못하고 물러갔었습니다. 밤이 되자 지나친 거조가 갈수록 더하였는데 불효한 자식의 정성이 얕아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였으니 허둥대며 애가 타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합문 밖에 나와 명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왕세자가 승전색으로 하여금 다시 아뢰기를,
"비록 차마 듣지 못할 분부를 내리셨으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었으며 또 밤이 깊어가는데, 여전히 어가를 돌릴 기미가 없으니, 애가 타 어쩔 줄을 모르겠으며 비록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갈 뜻이 없습니다."
왕세자가 세 번째 아뢰기를,
"하교를 내릴 때마다 이처럼 차마 듣지 못할 말씀만 하시어 궁으로 돌아가실 날이 갈수록 더더욱 막연하기만 하니, 어찌 한 걸음이라도 돌릴 마음이 있겠습니까? 더욱 황공하기만 하여 그대로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수 써서 내린 글도 차마 받들어 따를 수가 없기 때문에 감히 봉해 올립니다."
왕세자가 네 번째 아뢰기를,
"신의 효성이 얕아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잇따라 하시니, 신이 더욱 죽을 죄를 지어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비록 이렇게 하교하셨으나 어찌 감히 물러가겠습니까? 즉시 전으로 올라가시기를 천만 엎드려 빕니다. 그리고 손수 써서 내리신 글은 할 수 없이 도로 올립니다."
왕세자가 다섯 번째 아뢰기를,
"하교할 때마다 이처럼 차마 듣지 못하겠으니 신이 더욱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두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너무나 애가 타 어쩔 줄을 모른 나머지 신이 죽을 죄를 지어 다시 말씀드릴 일이 없습니다."
왕세자가 여섯 번째 아뢰기를,
"차마 받들어 따르지 못할 하교를 매양 이처럼 하시니, 비록 들어간다 하더라도 여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이 더욱 죽을 죄를 지어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왕세자가 일곱 번째 아뢰기를,
"매양 이처럼 하교하시니,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할 수 없이 문을 밀치고 곧바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왕세자가 이어서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궁으로 들어갔다.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 12월 19일 을사 1번째기사 , 우의정 김상로와 제조 박문수가 동궁의 효성이 지극함을 아뢰다
임금이 약방의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
"동궁이 창의궁으로 갈 때에 의장을 갖추지 않고 부어교(鮒魚橋)에서 여(輿)를 물리치고 도보로 갔으니, 변에 대처하는 절차를 극진하게 하였습니다."
하자, 제조 박문수가 말하기를,
"돈화문 밖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엎드려 대죄하였으며, 경명문(景明門) 밖에서는 장막을 모두 철거하고 추운 데에 앉아 음식을 들지 않고 연일 눈물을 흘리면서 경재들을 만날 때마다 선처할 수 있는 계책을 묻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그러하였는가, 동궁이 그랬단 말인가?"
하였다.
영조실록 80권, 영조 29년 10월 27일 무신 4번째기사 , 친정에 입시할 때 왕세자에게 명하여 시좌하게 하다
영조가 말하기를,
"겉으로는 관원이 서로 경계하는 것인 체하고 속으로는 계략을 감추어서 사당(私黨)을 구제하는 자로 말하면 변환이 빨라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네가 어떻게 그 정상을 알겠느냐? 오늘 너에게 시좌하라고 명한 것은 장차 이 일을 경계하려 한 것이다. 네 뜻에는 어떻게 여겨지느냐?"
하매, 왕세자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감히 마음에 새기고 가슴에 지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 하교를 따르지 못하면 내가 오르내리시는 신명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 된다."
하매, 왕세자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하교가 이러하시니, 신이 비록 불민하기는 하나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답한 것이 착하다. 사관은 상세히 적으라."
영조실록 80권, 영조 29년 11월 29일 경진 1번째기사 , 왕세자가 삼복을 행하다.
왕세자(王世子)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사형(死刑) 18인을 결단하였다.
영조실록 80권, 영조 29년 12월 1일 신사 2번째기사, 우부승지 조명정이 삼복을 행한 왕세자의 말을 전하다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조명정(趙明鼎)이 말하기를,
"어제 삼복(三覆) 때에 왕세자가 ‘오늘 참작하여 처리한 자는 대조(大朝)께서 하교하신 것 밖에 한 사람도 부생(傅生)238) 의 의논에 붙인 것이 없으므로 삼가고 불쌍히 여겨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을 우러러 본받지 못한 것이 송구하다.’고 분부하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밤에 동궁(東宮)에게 물었더니, 과연 충분히 삼갔다."
하였다.
세자는 삼복을 해서 무려 18명의 사형수를 결단해서 살려냈다. 세자는 이 공을 영조에게 돌린것이다.
영조실록 80권, 영조 29년 12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대사헌 송창명을 파직하다.
왕세자(王世子)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송창명(宋昌明)을 파직하였는데, 곧 패초(牌招)를 받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의(執義) 이사조(李師祚)가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上達)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참고: 패초는 임금이 긴급할때 또는 야간에 승지를 시켜 신하를 부르는 것을 일컫는다. 대사헌 송창명이 바빳는지 세자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파직하였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1월 28일 무인 2번째기사 , 영의정 김재로가 사직하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정고(呈告)하고 사직하였으나, 왕세자가 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1월 10일 경신 1번째기사, 왕세자가 차대를 행하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다행히 4백 년 동안에 드물게 있는 경사를 만났으니, 동토(東土) 수천 리를 통틀어 누구인들 고무(鼓舞)하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저하(邸下)께서는 위로 삼전(三殿)을 받들고 또 이 해를 당하셨으니, 천하에서 이른바 지극히 기쁘고 지극히 즐겁다는 것을 우리 저하께서 아울러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이 지나치면 안일한 뜻이 싹트고 안일한 뜻이 극진하면 게으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상정(常情)이 같은 것인데, 올해의 방경(邦慶)은 지난 사책(史冊)에는 드문 바로서, 이것은 하늘이 돌보아서 돕고 조종(祖宗)께서 내리신 음덕의 아름다움이니, 저하께서는 더욱 마땅히 이를 깊이 생각해서 성실하고 전일(專一)하여 마치 깊은 못에 다가서고 얇은 얼음을 밟은 듯이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하늘이 돌보아서 도운 때에 보답할 방도를 생각하며, 비록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는 사이일지라도 방심하지 말고 살펴서 태만한 뜻이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도 싹트지 말게 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말하기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2월 29일 기유 2번째기사 ,왕세자가 산림의 선비를 불러오도록 정원에 하교하다.
왕세자가 정원(政院)에 하령(下令)하기를,
"이런 때에 산림(山林)의 숙덕(宿德)한 선비를 불러오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더구나 대조(大朝)께서 강연(講筵)을 잇달아 신칙하시는 때이겠는가? 본원(本院)에서는 반드시 이 뜻을 본받아 조사(措辭)하여 하유하라."
하였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4월 13일 임진 1번째기사,왕세자가 곡식을 이획시키다.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서 비국 당상을 소접(召接)하여 묘당(廟堂)의 계책을 물어 영남(嶺南)의 곡식 3만 석과 호남(湖南)의 곡식 2만 석을 점차로 통영(統營)에 옮기게 하였다. 전 통제사 조동점(趙東漸)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4월 14일 계사 5번째기사, 세자에게 논어를 외게 하다.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니, 임금이 서연(書筵)에서 강독(講讀)한 《논어(論語)》를 외라고 명하였다. 세자가 외기를 마치자, 임금이 묻기를,
"자로(子路)가 해어진 솜옷[縕袍]을 입고 호학(狐貉)039) 을 입은 자와 함께 서서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도(道)를 즐기기 때문에 해어진 옷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여곽(藜藿)040) 을 먹을 때인가 천종(千鍾)의 녹(祿)을 먹을 때인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여곽을 먹을 때나 천종의 녹을 먹을 때나 그 마음은 같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송(宋)나라 효종(孝宗)은 어진 임금이고 장준(張浚)은 어진 신하인데, 다시 떨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그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아래가 한마음이 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일마다 공정하면 한마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이 시기 영조의 나이는 예순이고 세자는 이제 스물이 되었다. 노론은 세자가 소론과 친한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세자는 확연히 소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세자는 조현명, 이종성 등 소론계 인사들과는 뜻이 잘 맞은 반면, 노론과는 그다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영조실록을 보면 노론 인사들의 의견을 모조리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시기 영조의 탕평책은 노론의 자리에서 소론 온건파를 포용한 부분적 탕평이었다. 영조는 경종 독살설이 떠오를 때 마다 소론에 대한 증오가 치밀어 올랐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5월 13일 신묘 2번째기사 , 《소학》 입교편을 강하다.
임금이 밤에 왕세자에게 명하여 시좌하게 하고 입직(入直)한 옥당(玉堂)의 관원을 불러 《소학(小學)》 입교편(立敎篇)을 강하였다. 끝나고나서 임금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소학》의 근본은 무엇인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경(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을 경이라 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본심(本心)을 지키고 방심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과연 괄목(刮目)할 만한 상대(相對)로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6월 5일 계축 1번째기사 ,사간 박치문이 이잠에 관한 풍문과 한권의 일을 아뢰다.
사간 박치문(朴致文)이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난적(亂賊)이 어느 세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흉악한 상소로 근거 없는 말을 하여 사류(士類)를 해치려고 꾀한 것으로 말하면 이잠(李潛)보다 더 참혹한 자가 없습니다.<중략> 하였는데, 왕세자가 답하기를,
"이잠의 일은 풍문을 죄다 믿을 수 없다. 한권을 주관한 사람을 견책하는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이 말에 나오는 ‘이잠’ 은 성호 이익의 둘째 형으로 숙종 32년에 “서인들이 동궁(경종)을 모해하려 한다” 는 상소를 올렸다가 혹독한 형신끝에 죽은 인물이었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6월 5일 계축 2번째기사,왕세자가 이잠의 일을 영의정 이천보에게 묻다.
왕세자가 이잠의 일을 대신에게 물으니,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말하기를,
"이잠의 흉악한 상소는 참으로 신축년088) ·임인년089) 과 무신년090) 에 있었던 일의 장본(張本)입니다. 숙묘(肅廟)께서 진노하여 친국(親鞫)하셨는데, 그 뒤에 조태구(趙泰耉)가 아뢰어 장령을 추증(追贈)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이잠과 같은 마음인 것입니다. 또 대간(臺諫)이 상소하여 추탈(追奪)을 청함에 따라 어제 장적(帳籍)을 상고하게 하였더니, 경오년091) 에 학생(學生)이라 쓰고 증직(贈職)을 쓰지 않았다 합니다."
위 6월5일 1번째, 2번째 기사에서 사간 박치문이 상서하였을 때 세자는 “이잠의 일은 풍문을 죄다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어렴풋이 노론의 뜻에 따르지 않음을 내비쳤고, 이어서 세자가 직접 영의정 이천보에게 이잠에 관해 다시 물었다.
이는 노론입장에서 볼 때에는 세자가 이잠의 일에 대해 묻는 자체가 경종 독살설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여기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 바로 영조가 아닐까?
아마도, 세자가 “이잠”의 편을 들고 또 “이잠”에 관해 질문한 자체가 노론과 영조가 볼 때 세자는 확실히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세자가 경종 독살설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는 자체가 노론들게는 위협이며 또 영조는 과거 이방원처럼 자신을 몰아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을 것이다. 고로 어떤 경우에도 세자가 즉위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대상이었다고 보여진다.
영조실록 81권, 영조 30년 6월 14일 임술 2번째기사, 왕세자에게 친히 글을 지어 학문을 묻다.
임금이 친히 글을 지어 춘방관(春坊官)에게 명하여 왕세자에게 받들어 보이게 하기를,
"들으니, 네가 《사물잠(四勿箴)》을 세 번 다시 강하여 확실하게 하였다 하는데, 사물(四勿) 가운데에서 ‘물(勿)’ 자가 근본이 되니, 한 가지 일이라도 예(禮)가 아닌데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이는 ‘물’ 자의 기치(旗幟)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학문이 천박하다 하지 말고 사실대로 대답하라."
하자, 세자가 글로 우러러 대답하기를,
"공경히 성교(聖敎)를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대저 사욕(私慾)이 일어나는 것에는 크고 작고 깊고 얕은 것이 있습니다. 큰 것은 올 봄에 예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것에 삼가지 못하여 엄한 하교로 권면하시게 하였으니 자신의 사욕을 이기지 못한 첫째이며, 자주 서연(書筵)을 멈추어 스스로 안일(安逸)로 돌아갔으니 자신의 사욕을 이기지 못한 둘째입니다. 그 나머지 작은 것은 일용 행사(日用行事)하는 사이에도 어찌 사욕이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큰 것의 해독이 작은 것보다 깊을지라도 혹 작은 것을 소홀히 하여 신중히 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해독이 도리어 큰 것보다 심할 것입니다. 예전에 소열제(昭烈帝)가, ‘악(惡)이 작다 하여 행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지언(至言)입니다. 신은 본디 학문이 천박하니, 잘못이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원량(元良)의 글은 이치가 맞으니 기쁘다."
하였다.
영조실록 82권, 영조 30년 9월 26일 임인 3번째기사,
팔도의 유생 안형(安衡) 등이 상서하여 선정신 송시열·송준길을 성무(聖廡)에 종사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조 30년 이시기 노론에서는 팔도의 유생들을 동원하여 숙종때 사사당한 노론 영수 송시열의 신원을 회복하기위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무려 9월 한달 내내 유생들이 같은 상소를 반복해서 올렸다.
영조실록 83권, 영조 31년 1월 18일 임진 1번째기사,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이 차자를 올려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하고 대조께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왕세자가 답하기를,
"내가 아무리 정성이 얕다고 하더라도 어찌 경(卿)보다 못하겠는가? 어버이를 받들어 칭경(稱慶)하는 것은 위로 어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 답을 보고서 여러 차례 아름답게 여기며 감탄하였다.
영조 31년 2월 4일, 전라 감사 조운규(趙雲逵)가 나주의 객사(客舍)에 흉서(凶書)가 걸린 변고를 치달(馳達)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나주벽서사건’이다.
사건 발생 1주일 만에 범인이 체포되었다. 윤취상의 아들 윤지라는 인물이었다. 윤취상은 경종 때 한성 판윤, 훈련대장을 역임하면서 김일경, 박필몽 등과 함께 노론 제거에 앞장섰던 소론 강경파였다. <이덕일의 저서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212 p>
이 ‘나주벽서사건’과 후일 ‘토역경사건’으로 인해 영조와 세자가 본격적으로 갈라서게되는 계기가 된다. 노론은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 박멸의 기회를 잡게된다. 노론은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모는 계기로 삼았고, 영조는 이를 머뭇거리지 않고 추인했다
영조는 세자도 자신의 뜻을 따라 소론 전체를 역적으로 몰아가야 하는데 세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후 세자는 노론들이 상소를 올려 권두형, 임천대, 홍익원, 이광사, 조동하, 김윤, 허계 등을 모두 죽일 것을 청했을 때 이를 모두 거부했고,
그 다음날도 민후기를 죽여한다고 하자 거부하고, 조동하, 김윤은 사형시키고 기언표, 이양조는 국문하자고 하나 그것도 거부했다. 또 박태신, 김윤을 노적하자고 청했으나 거부하고, 영조 31년 6월에는 관작을 추탈당한 이광좌도 유봉휘, 조태구 처럼 역률을 시행하자고 했으나 세자는 모두 거부했다.
여기서 세자는 완벽하게 노론과 영조에게 반기를 들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게된다.
이 나주벽서사건으로 인해 노론에게는 세자의 즉위는 두려운 일이 되었다. 지금의 살육과 정치보복이 세자가 즉위하고나면 바로 노론 자신들이 보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된다. 이로써 노론에게 세자는 제거해야 할 정적이 된것이다.
영조는 나주벽서사건 처리 후 역적 토벌을 축하한다는 ‘토역경과’를 베풀었는데 , 역적으로 몰린 소론이 바로 이 토역경과장을 반발의 장으로 삼은 사건이 발생한다.
과장에서 한 선비가 답안지 끝부분에 파리 머리만한 글씨로 조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적어 제출한 것이다. 바로 위 나주벽서사건의 주모자 윤지의 숙부 윤혜였고 윤취상의 아우였다.
더구나 공초 도중에 윤혜가 춘천에서 군사를 모아 거병하려 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까지 밝혀진 것이다. 즉 영조 초기 이인좌의 난이 또다시 일어날 뻔한 것이었다.
영조가 윤혜의 형을 현장에서 집행하면서 역적을 토벌하다는 명목에서 갑옷을 입고 집행했다. 그만큼 영조는 소론들이 또 다시 난을 일으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세자라는 작자가 이들 소론편을 들고 있었으니 영조의 눈에는 이제 세자가 더 이상 세자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과 노론을 파멸시키려는 소론 역적일 뿐이었다.
이 두사건을 계기로 소론은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고 완전히 몰락했다. 즉 노론 일당의 독주가 시작된 것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해왔으나 백성들에게 비친 영조의 탕평책은 노론쪽으로 기울어진 정책이었고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에게는 즉위 초기부터 지속 불만을 가지도록 영조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입으로는 탕평, 탕평 하면서 은근히 마음 속으로는 노론을 지지하며 정책을 이어왔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이 지속 발생했던 것이다. 소론 강경파는 영조를 임금이 아닌 선왕 즉 경종을 독살한 역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1월 29일 정유 1번째기사,
왕세자가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고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갔는데, 약방 제조(藥房提調)가 보여(步輿)에 탈 것을 청하니, 대답하기를,
"숙경(肅敬)해야 하는 곳이거늘 어찌 보여를 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 11월 8일 병신 6번째기사,
임금이 좌상과 우상에게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7월 이후로는 진현(進見)한 일이 없다."
하니, 김상로(金尙魯)가 손으로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아뢰기를,
"신 등이 밖에 있어서 진실로 이런 줄을 몰랐습니다. 신 등이 성상 앞에 있을 때에는 말을 가리지 않고 다하였으나 동궁에게는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성교(聖敎)를 받들었습니다만, 마땅히 입대(入對)하여 조심하도록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 사건, 중전 서씨의 사망, 그리고 새 중전간택으로 김한구의 15살 딸 김씨(정순왕후)와 영조의 혼인 등의 사건이 있었다. 소론이 완전히 몰락한 후 노론은 정순왕후와 결탁하여 세자와 영조를 이간질 했다. 그 결과 영조는 세자를 진현할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영조의 마음속에서도 세자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 11월 11일 기해 3번째기사.
"나같은 불초 불민한 사람으로 성효(誠孝)가 천박하여 침선(寢膳)을 돌보는 절차를 이미 때맞추어 하지 못하였고 양 혼전(兩魂殿)의 제향도 정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자식된 도리에 진실로 어긋남이 많았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이것이 누구의 과실이겠는가? 바로 나의 불초함이다. 대조(大朝)께서 전후(前後)로 가르침을 거듭 간곡하게 하심은 진실로 자애로운 성의(聖意)와 사물(事物)에 부응하는 지극한 가르침에서 나온 것인데, 내가 불초 불민함으로 인하여 만분의 일도 우러러 본받지 못하였고 작년 5월 책궁(責躬)하겠다고 한 말도 역시 한두 가지도 실천한 일이 없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황공하고 부끄러움이 갑절이나 되어, 비록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으나 이루지 못하겠다. 강학(講學)을 돈독하게 하지 못하고 정사를 부지런하게 하지 못한 데에 이르러서는 어느 것도 나의 허물이 아닌 게 없는데, 어제 양 대신(兩大臣)이 반복해 진면(陳勉)함으로 인하여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더욱 나의 불초하고 불민함을 깨달았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추회 막급(追悔莫及)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워 추회 막급하다. 지금부터 통렬히 스스로 꾸짖고 깨우쳐 장차 모든 일에 허물을 보충하여 한번 종전의 기습(氣習)을 바꾸려 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실천하여 행하지 못하고 작년과 같이 된다면, 이는 나의 과실이 더욱 심한 것이다. 아! 조정의 신료들은 나의 이 뜻을 체득하여 일마다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임금이 남태저에게 명하여 읽게 하고 무릎을 치며 경탄하기를,( 위 세자의 하령을 전해들은 영조가 )
"기특하고 기특하다. 조선이 흥하겠구나! 비록 태갑(太甲)278) 이 허물을 뉘우쳤다 하여도 여기에 지나칠 수는 없겠고, 내가 동짓날 반포한 윤음보다 낫다
영조가 7월부터 11월까지 동궁을 진현하지 못했다라는 말을 들은 세자가 탄식하며 승정원에 자성하는 하령을 내린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이 때에 세자의 정신병이 심해져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위와 같이 승정원에 하령해 자신의 불효를 탄식하는 세자가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는 말은 그 말이 사실일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사도세자가 꿈꾼나라’에서 말하고 있다.
영조 재위 34년(1758) 경에는 영조가 은근히 세자를 수시로 견제하고 세자의 충절을 확인하는 일이 잦았다. 꾸짖었다가 용서하고 꾸짖었다가 용서하기를 반복했다.
이런 잦은 영조의 꾸짖음에 대해 소론 영의정 이천보가 영조에게 “동궁의 자질은 천고에 빼어나므로 전하께서 진실로 관대하게 포용하신다면 덕성을 이룰 것이며 털끝만한 잘못도 없을 것입니다” 라고 진언했다가 파직당하고 만다.
이 시기에 영조는 과거 경종임금 시대 때 자신이 세자로 있으면서 경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신의 마음을 되새기며 세자 또한 과거 자신처럼 영조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것으로 보인다.
영조실록 96권, 영조 36년 7월 10일 임자 2번째기사 ,석음재에 나가 약방의 세 제조를 인견하고 왕세자의 환후를 묻다.
임금이 석음재(惜陰齋)에 나아가서 약방(藥房)의 세 제조(提調)를 인견(引見)하고 이후(李)에게 묻기를,
"경이 동궁(東宮)을 친히 보았는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신이 비로소 종처(瘇處)를 보니 혹은 종(腫)을 이루었고 혹은 곪아 터졌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의관(醫官)들은 무엇이라고 이르던가?"
하니, 이후가 말하기를,
"온천에 목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효과가 있을지라도 종종 다시 재발하니, 장차 어떻게 계속할 것인가?"
하고, 또 말하기를,
"어제 온천 목욕을 금하는 교시를 내렸는데, 이제 내 아들임으로써 문득 허락하면 백성들이 나를 믿는다고 이르겠는가?"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세자[元良]가 아직 조섭(調攝)하는 중에 있으니 마음에 간절히 민망스러운데, 들은즉 여러 의원들이 모두 온천 목욕을 청한다고 한다. 이 뜻은 내가 이미 있었고, 혹시 효력이 있는데 허락하지 아니하면 이는 어찌 아비가 된 도리이겠는가? 이로써 빙탄(氷炭)이 마음속에 섞여서 음식이 맛이 없고 잠자리도 편치 않다. 여러 의원의 말이 이와 같으면 무릇 어찌 버티고 어려워하겠는가마는, 이제 한더위를 당하여 조섭하는 중에 어떻게 말을 몰고 달리겠는가? 군병(軍兵)의 노상(勞傷)과 농민의 대후(待候)는, 아픔이 몸에 있는 것과 같다. 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 처서(處暑)가 지나고 생량(生凉)한 뒤에 날을 가려 거행하라."
하였다.
영조 36년 7월이면 날시가 무척 더운 날씨로 이때 세자가 습창이 걸려 치료중이었다. 영조는 온천목욕을 금하는 교시를 내렸음에도 동궁의 습창에 온천욕이 좋다는 의관들의 의견에 따라 세자의 온천행을 거행토록 지시한 것이다.
‘한중록’에는 이때에도 세자가 정신병이 심했다고 하는데 세자의 병은 정신병이 아니라 다리의 습창 곧 종기였다.
또 ‘한중록’에서는 세자의 온천행에 대해서도 세자가 칼을 들고 화완옹주를 위협해 영조를 조르게 해서 온천행을 가게되었다고 했는데 참 어처구니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나이 25세나 되고 대리청정 한 지가 10년이 된 세자가 다리 습창을 치료하기 위해 옹주를 칼로 위협해서 영조에게 허가를 받아오도록 협박했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가 들으면 웃을 일이다.
영조실록 96권, 영조 36년 7월 21일 계해 3번째기사 ,
왕세자가 직산(稷山)에 이르러 유숙하고, 충청 감사 구윤명(具允明)을 접견하여 하령(下令)하기를,
"원근(遠近)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으니, 사람과 말이 복잡한 가운데 반드시 넘어지고 쓰러질 염려가 있을 것이다. 적간(摘奸)하여 수색해 물어서 각별히 존휼(存恤)하고 구경하는 사람을 구타해 쫓지 말며 전곡(田穀)을 손상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세자의 온천행 중에 직산에 이르러 유숙하면서 충청 감사에게 하령하는 말을 보면 행렬을 구경하다가 행여 백성들이 쓰러져 다치지 않을까를 걱정하고 병사들에게 구경꾼 백성들을 구타하거나 쫓지말고 곡식을 손상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령하는 것을 보면 진정 성군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에도 한중록의 기록을 보면, 『”경진년(영조36년)을 당하니, 그해는 병환이 더욱 위독하시고, 대조께서도 책망이 날로 심하시매 울화는 점점 성화시고, 의대병환이 극심하더라,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보인다 하시고 다닐 때는 미리 사람을 보내어 금하시고, 나가실 때 혹 미처 피하지 못하여 얼핏이라도 보이면 그 옷을 못 입고 벗으시고 비단 군복 한 벌을 입으시려 하면, 군복 몇 벌을 이어서 불사르시고 겨우 한 벌을 입으셨으니, 기묘(영조 35년) 경진년 사이에 군복 지어서 없앤 것이 몇 궤인지 알리요.” 라고 어떻게 한사람에 대해 같은 시기의 기록이 이처럼 확연히 다른 예는 아마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 이덕일, 269~ 270p>
세자의 온천행 이후 영조가 온천 행차 때의 세자의 행실에 대해 묻자 대신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학어(세자의 행차)가 한 번 임하자 호중(충청도) 인사들이 비로소 세자의 덕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부로나 서인들 치고 세자의 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야말로 신민의 행복입니다."
이상에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세자의 언행을 살펴보았다. 그 어디에도 ‘정신병자’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세자의 관서행 이후 세자가 뒤주에 갖혀 사망할 때 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세자가 온양 행궁에서 돌아온 영조 36년 8월 초부터 세자가 관서행을 단행하는 37년 4월까지 무려 8 개월 동안 세자는 영조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관서행”의 내용은 세자가 영조 몰래 관서 즉 평안도 지방을 유람하면서 많은 비행을 저지러 결국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영조도 “조리 중에 있으니 전현하지 말게 하라”라고 하며 세자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 후 세자도 약방의 입진 외에는 모든 청대를 거부하면서 우악하게 비답만 했다.
세자는 아프다는 핑계로 정사에 손을 놓고 있었다. 이는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이덕일 소장은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276p>
아마도 온양행궁을 통해서 지방관리들과 모든 백성들이 한결같이 세자의 덕을 칭송하게되었고 이를 전해들은 영조는 덜커덕 겁이 났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론과 결을 달리하는 세자가 지방관리와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다는 것이 영조에게도 큰 부담이었고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온양행궁 전에도 영조는 수시로 세자의 충성도를 시험했으며 세자의 효심과 충성심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곤 했었는데 온양행궁으로 세자의 덕과 군대 지휘능력을 보고는 세자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왕위를 빼았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떨고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서 10개월 동안이나 세자를 만나지 않은 것이다.
세자 또한 이런 영조의 불안감을 헤아리고 행여 세자 자신에게 화가 미칠것을 우려해 온양행궁에서도 급히 돌아왔고 돌아온 이후에는 더 이상 자신은 왕위에 욕심이 없는 사람 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위해 병을 핑계로 의도적으로 정사를 방기한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도 온양행궁 이후의 세자와 영조의 심리적 대립을 두고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영조 37년 4월 경에는 세자가 관서행을 결심하였고 관서행 중에 세자는 여인들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이 또한 세자가 의도적으로 영조와 노론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일부러 여자들을 데러왔을 가능성이 높다
위에서 보았듯이 세자 10살 이후부터 관서행이 있기까지 세자의 언행을 살펴보면 세자가 여자나 데리고 놀면서 음행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학문을 닦고 영조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모습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
그런 세자가 여자를 궁에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은 뭔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행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세자가 온양 행궁 이후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해지자 영조와 노론은 점점 더 불안해졌을 것이며 이것이 세자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정사를 방기하도록 만들었고 이어서 관서행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여자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고 왕위에도 관심이 없는 여자에 미쳐있는 한심한 인간일 뿐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한 행위라고 보여진다.
어쩌면 세자가 방탕하게 허구헌날 술을 마시고 여자를 불러들이고 주색잡기를 궁내에서 했다면 폐세자가 되고 쫓겨나 목숨은 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양 행궁에서 보았듯이 세자는 누가 보아도 효종대왕 이상으로 문무를 겸비하였고 덕성이 높았으며 관리와 군부대를 통솔하는 지휘능력까지 다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더 이상 영조와 노론에게는 절대 살려둘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으로 여겨진다. 어떻게 하든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쯤에서 “후흑학” 이라는 재미있는 도서가 떠오른다.
‘후흑학’ 지은이 신동준은 서울대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10년간 언론계 정치부 기자를 역임하고 서울대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21세기정경연구소 소장과 여러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2019년도에 사망하였다.
‘후흑학’은 청조 말의 기인 이종오가 저술한 것이다. 신동준의 이 저서는 이종오의 이 책을 해설한 해설서이다. 이 ‘후흑학’에는 이런 문구가 나온다.
” 조직에서 맑고 투명한 성정은 미덕이 아니다. 즉 겉은 온화하나 속은 어두워서 결코 들키지 않는 것 이것이 최고의 경지이며 조직에서 성공한다“
세자가 청조 말기의 이종오의 책 ‘후흑학’을 보았더라면 어쩌면 죽지않고 왕위에 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관서행을 하면서 세자가 보인 행동은 세자의 천성이 그대로 드러난 행동이었으며 그것을 ‘후흑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선 살아남기위해 의도적으로 천성을 숨기며 훗날을 기약하는 그런 인물은 아닌것이다.
세자가 관서행의 결과로 결국 뒤주에 갖혀 죽게되는데 세자가 관서행을 가기전에 아마도 우의정을 역임한 소론 영수 조재호를 만났고 조재호가 평안 감사 정휘량을 소개해주어 정휘량과 손잡고 평안 감사 휘하의 정예군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은 추측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283p>
이 정휘량이란 인물이 세자가 관서에서 한 말과 행위를 홍봉한에게 그대로 전했고 그 대가인지 몰라도 정휘량은 영조 37년 8월 좌의정으로 승진한 홍봉한의 자리였던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혜경궁은 ‘한중록’에 홍봉한이 정휘량을 통해 세자의 관서행을 알았다고 적고 있다<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283~284p>
노론은 관서행을 계기로 세자를 제거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노론은 한층 초조해졌다. 왜냐하면 영조의 나이가 일흔이 다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자는 관서행에서 자구책을 마련했을것이고 이 자구책은 만약의 경우 군사 행동을 단행하는 내용도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301p>
그런 와중에 드디어 나경언의 고변이 나타난다.
나경언 이란 인물은 액정 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중인일 가능성이 있다. 일개 중인의 신분으로 대리청정하는 저군을 고변한 것이다. 대리청정을 한다는 것은 곧 임금의 지위에 있는데 일개 중인이 왕조국가의 임금을 고변한다는 것은 말이되지 않는다. 고변의 내용이 사실이든 거짖이든 이유를 막론하고 능지처참 감인것이다.
그러나 형조 참의 이해중은 이 고변서를 직속상관인 형조 참판이나 형조 판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정식 보고체계를 무시하고 바로 매형인 홍봉한에게 전달하였다. 홍봉한은 영의정으로서 일개 중인이 세자를 고변했으면 직접 진상파악을 해야하고 수사를 진행해야하는데 모든 것을 생략하고 곧 바로 영조에게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 홍봉한의 행동이 바로 세자를 죽이려는 노론의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추측된다.
영의정 홍봉한은 설령 형조참의 이해중이 나경언의 고변서를 들고왔으면 곧바로 세자에게 보여주고 보고했어야 한다. 그러나 세자는 완전히 배제하고 영조에게 곧바로 보고한것이다. 만약 세자에게 이 고변서가 먼저 보고되었으면 세자는 곧바로 나경언을 직접 친국했을테고 그리하면 뒤에서 이를 모의한 자신들의 이름이 나경언의 입을통해서 밝혀지게되니 세자가 나경언을 친국하지 못하게 영조에게 직접 보고한 것으로 판단된다.
판의금부사 한익모가 나경언을 사주한 자를 한시바삐 조사하기를 청하자 이에 분노한 영조는 한익모의 관직을 파면시키고 또 대사관 이심원이 한익모를 두둔하자 그도 파직시켰다.
영조는 나경언의 배후를 조사하자는 청에는 벌컥 화를 냈다. 왜? 세자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는데 배후를 조사하면 노론 배후세력이 드러나기에 영조는 배후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나경언의 고변의 핵심 내용은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즉 세자가 군사 정변을 일으키리라는 고변인 것이었다. 영조는 그 배후의 불순한 의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오직 세자의 변란에 대해서만 의심했다. 세자는 완벽한 함정에 빠졌다. 라고 이덕일 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310p>
이렇듯 나경언의 고변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자신은 변명의 기회도 봉쇄당한 것이다. 영조가 나경언이 있는 국청자리에 세자를 불렀을 때 홍봉한은 “동궁은 죄인과 같은 뜰에 있게 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죄인을 내보내야 합니다”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세자를 위하는 말 같으나 사전에 세자와 나경언을 대질시키면 세자가 강하게 변명할 것이므로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이덕일은 저서에서 말하고 있다.
결국 나경언은 본인의 입으로 세자를 모함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사형에 처해졌다. 세자의 혐의는 풀렸다. 그러나 세자는 함정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이후 세자는 금천교에서 대죄를 하다가 장소를 시민당 뜰로 옮겨 계속 대죄했다. 무려 8일간 계속해서 시민당 뜰에서 대죄했다. 홍봉한이 세자를 찾아왔고 “기후가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세자는 “황공하게 대죄 중인 몸이 어느 겨를에 기후를 논하겠소?” 라고 하였다.
홍봉한은 그래도 자신의 사위라고 일말의 양심이 있는척 하기위해 세자를 찾아 기후를 여쭌것이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 나경언의 고변에 따라 세자를 책망하는 영조,
한참 후에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위 실록내용 중에 왕손의 어미란 빙애라고 불렸던 은전군과 청근현주의 어미인 귀인 박씨를 말한다. 옹주가 임금의 서녀라면 ‘현주’는 세자의 서녀이다. 박씨는 인원왕후전 침방 나인이었다.
세자의 비행은 이렇다. 귀인 박씨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마지막으로 세자의 관서행이다. 이런 죄목으로 아들인 세자를 죽일만큼 큰 죄는 아닐테다. 그냥 폐세자 시키고 궁밖으로 쫓아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정도의 죄목으로 아들을 죽였을까?
세자는 이와 같은 급박한 상황속에서 조재호를 불렀다. 은퇴한 소론 영수 조재호를 부른 이유는 세자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버리면 노론세력이 곧바로 자신을 제거할 것 이라는 두려움에 미리 조재호와 협의해서 군사를 준비하고 궁궐안에서는 세자는 땅굴을 파고 군사무기와 말을 준비해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또한 나경언의 고변을 사주한 홍계희와 더불어 군사를 동원해 궁성을 호위하고 하궐로 통하는 문을 막았다. 나경언의 고변 이틀 후인 5월24일에는 삼군문 대장 구선행 등을 불러 창덕궁 입직 군사의 3분의1을 감하라고 명했다. 창덕궁 입직군사의 임무는 세자의 호위다. 즉 영조는 세자가 동원할 우려가 있는 군사를 미리 감한 것이다.
영조가 가장 분개한 것은 세자의 개인적인 비행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도전이었다. 영조는 조선 개국 임금 태조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던 사건을 잘 알고 있을것이다. 영조의 머리속에 지금의 세자는 이방원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나경언이 고변하고 세자가 대명하는 5월 24일 영조는 홍화문에 나가 시장 상인들을 불러 세자가 꾸어간 돈을 갚아주었다. ‘영조실록’은 이 돈이 세자가 유희, 또는 측근 인사들에게 상을 주느라 쓴 돈이라고 기록했지만 실은 세자의 군사비일 가능성이 크다고 이덕일 소장은 책에서 쓰고있다.
관서행에서 군사동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조재호는 춘천에서 동지들을 결합하고 세자는 동궁에 무기고를 마련한 것이다. 결국 이 자구책이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라고 이덕일 소장은 설명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꿈꾼나라, 이덕일, 328p>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 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고,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라도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鄭翬良),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肇)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진언(陳言)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 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신만·홍봉한·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영조는 위 영조실록 5월 13일자에서 보듯이 세자와 조재호가 합심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곧 궁궐로 진격할듯이 두려워 하고 있다. 그 만큼 영조는 이시기에 세자와 조재호의 군사가 곧 들이닥칠 듯한 불안감에 휩쌓여있었다.
금방이라도 세자와 조재호가 동원한 군사가 칼을 들고 자신의 목에 겨눌 것 같은 불안에 휩쌓여 있었던 것이다.
국내 석사학위 논문
[ 『한중록』의 자전소설적 특성연구, 정광임,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 , 2006년, 국내석사논문 ]
국내 석박사 논문 중에 조선왕조실록의 사료에 바탕을 두고 임오화변을 보는 시각을 가진 보기드문 논문이다.
‘한중록’에서 말하는 세자의 기행과 조선왕조실록을 비교해가면서 ‘한중록’ 을 설명하고 있다.
혜경궁은 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한 번도 어가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다.봄가을 마다 기다렸지만 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한 번도 데리고 가지 않아,이 또한 세자가 울화병에 걸린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혜경궁은 세자가 영조 32년(1756년)에 처음으로 명릉(숙종의 능)에 가게된 것이 기뻐 목욕재계하며 정성을 다했고 탈 없이 다녀왔기에 병환이 없는 듯 하
더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세자는 그전에 이미 여러 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다.영조28년(1752년)2월36)영조가 태묘(태조의 묘인 건원릉)와 영희전 나아갈 때,그리고 그 다음 해인 영조 29년(1753년)7월37) 태묘에 거동할 때도 수가했으며,같은 해 12월 태실에 나아갈 때38)도 따라갔다.
혜경궁은 임오화변의 원인을 영조와 세자와의 갈등으로 인한 세자의 정신병에두었기에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능행수행에 대해서도 의도적인왜곡이 필요했을 것이다.
-- 위 논문 15p.
혜경궁은 영조 24년(1748년)에 영조는 내관에게 맡기시기 답답하오신 일을 동궁에게 대리하기 시작했는데 한 달에 여섯 번 있는 차대에 보름 전 세 번은 영조가 하고,동궁이 시좌하고,보름 후 세 번은 세자가 혼자 하였다고 했다.그런데 일마다 순편치 않아 매사에 탈이 많았다 했다.세자가 상소에 대한 비답을 영조에게 물으면 ‘그런 일을 결단치 못하고 내게 번품하니 대리시킨 보람
이 없노라’하며 꾸중하고 묻지 않으면 ‘그런 일을 내게 품치 않고 왜 자단하리?’하며 또 꾸중하였다 한다.이일 저일 다 격노하여 마땅치 않게 여기더니 심지어 백성이 추운데 입지 않고 굶주리거나 한재가 나거나 천재지변이 있으면‘소조에게 덕이 없어 이러하다’며 꾸중하므로 세자는 근심걱정으로 일마다 두렵고 겁을 내 병환 드시는 징조가 싹 텄다고39)했다. 그러나 영조실록에 보면 영조 29년(1753년)에 세자는 사형수를 세 번 심리하는 3복제를 실시하여 이 해 겨울에만 18명의 사형수를 살려냈다.40)세자가 이공을 영조에게 돌리자 영조는 ‘어제 밤에 동궁에게 물어 보았더니 과연 충분히 삼갔더라’41)며 만족해하는 답을 내렸다.또한 영조는 세자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갖고 있었다.영조 30년(1754년)세자가 서연에서 ‘논어’를 강독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러 논어구절을 질문하며 세자 학문의 깊이를 살피고 영특한 세자의 자질에 만족해했다.42)적어도 영조 31년(1755년)나주 벽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영조와 세자 사이에는 별 갈등이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혜경궁은 이미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할 때부터 영조의 꾸지람과 미움을 받는 세자로 그려
세자의 정신질환의 배경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이 역시 혜경궁의 의도적인 왜곡이라 볼 수 있다. -- 위 논문 16p.
『한중록』에서 혜경궁은 세자가 정처(화완옹주)를 시켜 영조와 한 대궐에 살기 힘들다는 세자의 요구대로 영조가 궁궐을 옮겼다고 했다.또한 세자는 정처에게 “이 대궐만 있어도 갑갑하여 싫으니 네 나를 온양을 가게 하여 주려느냐.내 습으로 다리가 허는 줄은 너도 알 것이니 가게 하여라"
칼로 베겠다는 세자의 위협을 받은 정처가 영조에게 어떻게 고했는지 신통하게도 영조의 허락이 내려졌다고 세자의 온양행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러나 영조 36년 (1760년)에 세자의 습창에 대해 영조는 약방 제조에게 물어 온천에서 목욕함이 특효약임을 들었다.그러나 영조는 온천 목욕을 금한다는 교서를 내렸는데 내 아들이라고 문득 허락하면 백성들이 자신을 믿겠냐며 망설였다.그러다가
“효력이 있는데도 허락하지 않으면 이것이 어찌 아비된 자의 도리이겠는가? 빙탄이 마음속에 섞여서 음식 맛이 없고 잠자리도 편치 않다.그러나 한 더위를 당해 조섭중인 세자가 어떻게 말을 몰고 달리겠는가? 군병과 농민들의 아픔이 몸에 있는 것 같아서 이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으니 처서가 지난 후 거행하라” 하며 세자의 온천 행을 명하였다.
혜경궁은 세자의 온궁 행렬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였다. 거동하시는 위의는 소조하기 말이 못되어 당신은 전배나 많이 세우고 순령수 소리나 시원히 시키시고 취타나 장히 하고 가려 하오시는데 대조께서 마지못하 보내시나 어이 그렇게 차려 주시며,그때 신하들인들 두 분 사이에 누가 감히 입을 벌리리오.
혜경궁의 말은 세자 행렬이 초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의 행차가 그리 초라할 수는 없었다.왜냐하면 왕실의 위엄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영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영조의 하교를 전한다.
“왕세자의 온천 행차 때에 협련군은 훈국군 120명으로 체운하고,전후 상군은 금위·여영 두 영군 각 2백 명으로 하며,영기 3쌍,흑호의,흑기,홍자주장수 2쌍은 수어청으로 하여금 체운하게 하고,전도,개폐문육각은 각각 그 본관으로 하여금 대령하게 하며,삼취는 포로 대행하되 군기시에서 대령하며,배위는 일체 상례에 의하여 분승지,분도총부,분병조,분오위 장을 차하하며,배종은 단지 해당 도신만 경상에서 대후하고 수신은 그만두도록 하라”
국왕의 경호 병력인 최정예 부대 훈국군 120명을 합해 세자를 경호하는 병력 만도 520명이나 되었으니 장엄한 행렬이었던 것이다. --위 논문 18~ 19p.
위 석사학위 논문에서는 ‘한중록’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비교하면서 ‘한중록’을 소설적 허구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세자의 정신병을 언급하면서 혜경궁의 말대로 세자가 10살 경부터 정신병의 증상을 보였다면 영조는 세자를 폐하면 그만이요 또 아버지로써 아들의 병치료를 우선했을 것 이라고 보았다. 궂이 정신병인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것까지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정신병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약에 혜경궁의 주장대로 세자의 정신병이 극도로 약화되어 친모인 선희궁의 주청으로 영조가 결단을 내렸다면 이는 다른 기록에도 나와야 마땅하다.더구나 영조 52년(1776년)에 임오화변 사실을 승정원 일기나 공가의 문서에서 모두 세초하라는 영조의 엄명이 내려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임오화변이 혜경궁의 주장대로 세자의 정신병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왜 영조
는 그와 관련 자료를 모두 세초해 없애려 했을까.이는 당시 정치적인 권력과의 연관이 분명히 있음을 시사해 준다.
아무리 아들이 중병이라 하더라도 아비로서 죽이기까지 할까. 병을 고치거나 세자 자리에서 폐하는 정도면 될 일을 극도로 분노한 상태에서 뒤주 안에 가둬 굶겨 죽였다는 것은 혜경궁 말대로 아무리 영조의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세자의 병이 대리청정 직후부터 발병하여 10여년을 계속되어 왔다면 영조가 몰랐을 리가 없다.
만약 진짜 정신병이 있었다면 대리청정 관계 기록에 분명 나타나야 할 것이다.아버지를 위해 정조가 저술한 행장이나 원지에 언급조차 없고 다만 참변일 전후의 가해자 측의 기록에 나타날 뿐이다.
그러니 『한중록』이나 영조실록의 내용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임오화변의 원인은 혜경궁의 주장대로 세자의 정신병이 아니라 영조와 세자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당쟁이 개입해 일어난 일이라 하겠다. --위 논문 22~ 23p.
세자의 특이한 행동
첫째,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 12월 14일 경자 1번째기사, 대신들이 청대하고 선화문에 나아가 아뢰다가 노여움을 사다 . 이는 영조가 또다시 양위소동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종성이 여러 신하들과 같이 극력 간하자, 임금이 또 육아편(蓼莪篇)을 읽었다. 그리고 《춘방일기(春坊日記)》를 가져오게 하여 승지로 하여금 세제로 책봉하였을 때 사양하였던 상소인 사세제책봉소(辭世弟冊封疏) 세 편을 읽도록 하였는데, 밤 3경에 이르렀다. 왕세자가 팔짱을 끼고 임금의 앞에 서있었는데, 임금이 손으로 휘저으며 가도록 하고 말하기를,
"너는 무엇 하러 나왔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시를 읽을 것인데, 네가 눈물을 흘리면 효성이 있는 것이므로 내 마땅히 너를 위해 내렸던 전교를 반한(反汗)하겠다."
하고, 이어서 육아시를 읽어 끝 편에 이르자, 왕세자가 앞에 엎드려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참고: 밤 3경은 밤 11시 ~ 새벽 1시
둘째,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 1762년.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07) ·무인년108)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셋째,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내용이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1753년 또는 1754년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 1756년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 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
위 세번째 “세자의 특이행동” 내용은 위키백과에 쓰여진 내용으로,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속의 내용이라며 글옆에 편지 사진까지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영조실록과 위키백과의 내용을 보면 세가지 특이한 행동이 보인다.
첫 번째 특이행동은,
세자가 양위소동을 벌이는 영조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라고 실록에 쓰여있다. 아무리 세자가 미쳤어도 감히 임금이 양위소동을 벌인다고 팔짱을 끼고 폼잡고 위협하듯이 서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믿기지 않으며 이는 노론이 주도한 실록청에서 실록을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세자의 정신병적인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 기록했다고 의심해본다.
세자가 10세 이후부터 뒤주에 갖혀 죽을 때 까지 한결같이 학문을 닦는 모습과 임금에 대한 깊은 효심을 보여주는 내용들로 일관되게 기록되어있는데 느닷없이 양위소동에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라고 기록된것은 앞뒤 정황이 전혀 들어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두 번째 특이행동에서는,
영조가 했던 말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문맥을 살펴보면 영조실록을 기록하면서 신하들이 보았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영조가 했던 말을 사관이 작성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닌것이다. 사관이 기록한 것을 실록에 기록했다면 “임금이 말하기를” 이라고 쓰고 영조의 말을 따옴표 해서 기록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세자 사후 노론 사관들이 영조실록을 쓰면서 세자가 죽은 것이 세자의 정신병과 발작 등이라고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나경언의 고변이 있을 그 시기 대궐에는 소론이 완전히 몰락한 뒤였으며 모든 신하가 노론 일색이었기 때문에 실록청 신하들도 모두 노론이 장악한 상태에서 영조실록을 기록한 것이니 이런 의심이 든다.
세번째 특이행동에서는,
영조실록에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다는 편지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위키백과에는 세자가 써서 보냈다는 편지가 사진으로 등록되어 있다.
영조실록에는 세자가 10세 이후부터 죽기전까지 한결같이 학문을 닦고 영조에게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때문이다. 단지 뒤주에 갖혀 죽기 바로전에 세자가 울부짖으며 머리를 땅에 들이받고 하는 등 극도의 흥분상태를 보여주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는 세자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상태에서 나타난 행동으로 보여진다.
인터넷 “한국경제” 사이트 2007.6.15.일자 “”우울증 약 보내주세요”… 사도세자 심경고백 편지 내용은?” 이란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 와 있다. 그 속에는 이 편지들에 대해 이런 내용이 있다.
이들 자료는 1910∼1916년 사이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입수해 일본으로 가져갔으며, 현재 원본은 야마구치(山口) 현립 도서관에 있다. 도쿄대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교수가 이를 사진으로 촬영해 1965년부터 이 대학에 보관해오다 퇴직 후 유품으로 남겼다.
권 교수는 15일 서울대 국문과 학술발표회에서 번역 내용과 편지 고증 과정을 발표했다. 사도세자가 아내의 출산을 걱정하는 내용 등은 추가로 번역해 논문으로 낼 계획이다.
윗 글을 보면,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다는 편지는 실제로 세자가 보낸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기사 속의 편지 내용을 보면 세자가 우울증이 있었고 스스로를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 합니다” 라고 세자가 쓴 편지 내용이 나와있다.

결론
영조는 두 가지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경종 독살설에 대한 콤플렉스였다.
노론과 영조는 어차피 한 배를 탄 동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경종 독살설은 노론과 영조를 두고 백성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내린 의혹이고 소론인사들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았고 또한 세자가 장인에게 보냈다는 편지까지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세자의 행적들을 살펴보았다. 이어 석사논문도 한편 살펴보았다.
여기서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다는 편지에 대해 분석해보자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방어기재를 가지고 있다. 세자가 스스로를 향해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 합니다“
위 편지내용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세자가 스스로의 증상에 대해 홍봉한에게 알리고 있다. 저 편지 내용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세자가 불안하고 심리적으로 무언가에 쫓기고 있으며, 그와 같은 우울,불안 증세로 인해 초조해 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 구절에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 합니다” 에서는 연일 불안한 마음에 잠도 설치고 잠을 설치다 보니 정신도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해 “허황되고 미친듯 합니다”라고 스스로를 미쳤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그 어떤 바보도 자기 스스로를 바보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 어떤 정신병자도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향해 정신병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 바보나 정신병자는 자기 스스로는 바보가 아니고 정신병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정신병자” 입니다. 라고 말하면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다. 자기 자신이 한탄스럽고 한심하게 여기고 본인이 생각해도 얼토당토 않은 일을 했을때 우리는 “내가 미쳤지 정말” 이라고 말한다. 내가 진짜 미친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향해 미쳤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고 있다. 술취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당신 술 취했어요” 라고 하면 그는 “나 술취하지 않았어” 라고 강하게 부인합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어쩌다 가볍게 술한잔 하면 누가 그렇게 물으면 “어 나 지금 좀 취했어” 라고 말합니다. “좀 취했어” 라고 말하면 그는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취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때문이죠. 그러나 술이 완전히 취한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멀쩡하다고 생각해서 절대 술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게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인 것이죠
현대에는 무서운 범법자들이 많이 있었죠, 사회에서는 그들을 일러 “사이코패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범죄자 본인은 자신을 “사이코패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근데 반대로 “나 사이코패스야..” 라고 말한다면 그는 사이코패스가 아닙니다. 왜? 자신이 그렇게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다는데 대해 자각을 하고있고 반성을 하고 있기때문이죠.
영조는 제왕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론의 지지하에 왕이 되었고, 경종을 독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아마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자가 “이잠” 에 대해 신하들에게 물었다는 소리를 듣고 경악했던 것입니다.
프랑스 근대 철학자 볼테르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 볼테르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당신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물론 볼테르가 살아 생전에 했던 말은 아니고 후일에 볼테르의 전기를 쓰면서 그 속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만큼 볼테르는 사소한 의견이라도 존중하는 태도를 견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 지속된 당파싸움은 조선후기를 패망으로 몰고간 큰 원인 중에 하나였습니다. 영조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고 진정한 탕평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영조가 프랑스 근대 철학자 볼테르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았더라면 이런 비극은 최소한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말이죠
어찌되었던 지금까지 세자와 관련된 내용들을 살펴본 결과 세자는 한결같이 정상적인 사람으로 평가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조 38년 마지막으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세자의 목을 조여오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미친 것 처럼 울부짖으며 머리를 땅에 찢는 세자의 행동에 공감이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됩니다.
또 하나, 세자는 제왕으로서는 성군의 자질을 가진것을 분명해 보인다. 10세경부터 언행이나 학문수준이나 무예솜씨나 온천행에서 보여주었던 백성들과 수행대신들과 군사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볼 때 성군의 자질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독 남편으로서는 낙제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영조실록에도 마누라 혜경궁에 대해 애틋한 언행이 보이지 않고 살갑게 대하는 장면 하나 나오지 않는다. 뭐 의도적으로 실록청에서 그런 아녀자와 관련된 기록은 넣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디에도 마누라를 애틋하게 대하고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아마도 요즘 같았으면 두 사람은 벌써 이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위대한 아들 정조를 낳았지만 말이다.
혜경궁의 ‘한중록’은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말한다. 그렇다 문학으로서는 가치가 매우 높아보인다. 현시대에 혜경궁이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글솜씨가 뛰어나다. 구체적이고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고 자신의 심경을 묘사하는 장면도 예술이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포스팅은 2024년 5월에 발행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온국민을 위한 대한민국 역사교과서” 에대해 소개를 하며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